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운동장 놀이터에는 젤리 눈사람 혼자만이 남았다.
눈사람 친구들이 사라진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눈사람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눈사람의 투명한 젤리 눈에 아이들의 움직임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인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시간은 누가 고무줄처럼 늘인 것처럼 느리게만 흘러갔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몸짓이 과장되어 보였다.
홀로 남겨진 눈사람은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들을 점점 더 매일 그리워하고 있었다. 눈사람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홀로 녹아내리는 날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눈사람에게 한 두 번 관심을 가지다 흥미가 떨어지면 눈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시간이 되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눈사람은 흥미가 떨어진 아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이들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렇게 넘치는 사랑을 주기도 하고 거두어가기도 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른 사람들은 달랐다. 눈사람이 놀이터에서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부모님이라는 존재는 아이들을 보기 위해 매일 찾아왔다. 놀이터에서 지켜본 바, 그들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었다. 눈사람은 매일 아이들과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다.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다가 넘어져 다친 무릎에 난 상처를 보며 걱정이 됐는지 아이의 엄마가 물었다.
“이 상처는 뭐야? 아프지 않아? 어쩌다 그랬어.”
아이는 자주 있는 일인지 무릎에 난 상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아휴, 피가 나는데 뭐가 괜찮아. 이리 와봐.”
“아, 싫어.”
“잠깐만 와봐.”
엄마는 아이의 짜증에도 상처에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아이가 추울까 봐 옷을 여며주었다.
엄마가 아이의 밴드를 붙여줄 때, 눈사람의 투명하고 맑은 샛노란 색의 젤리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눈사람은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빠와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눈사람은 놀이터에 혼자남아 매일 이런 사랑을 꿈꾸었다. 매일 기다렸다. 부모님이 아이에게 주는 사랑. 그런 사랑.
젤리 눈사람은 생각했다. 더 이상 운동장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된다고. 눈이 모두 녹기 전에 자신을 만들어 준 엄마, 아빠를 빨리 만나야겠다고.
눈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에는 눈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눈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눈사람의 마음에는 한 아이가 눈덩이를 굴리며 느꼈던 감정들이 스며들었다. 눈사람이 그토록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눈사람을 만드는 동안 아이의 마음이 눈사람에게 스며들어 눈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계속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눈사람을 만들어준 그 아이는 함박눈이 내리던 날 할머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눈이 야구공만 하게 쥘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눈두덩이에서부터 어른의 무릎정도까지 오는 높이가 될 때까지 눈을 굴리는 동안 아이는 작년 엄마와 아빠, 모두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 순간은 이제 더 이상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드는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웠지만, 작년 겨울 아빠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마치 옆에서 아빠가 나뭇가지를 주어와 눈사람의 팔을 만들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혼자 스스로 나뭇가지를 주워 눈사람의 팔을 만들어었다. 아이는 벌써 아빠의 얼굴이 흐릿해졌지만, 아빠의 따뜻한 느낌만은 잊을 수 없었다. 아이는 어렸지만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빈자리가 항상 마음속에 자리할 것이라는 것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이의 이런 마음이 눈결정체에 녹아들어 눈사람은 매일 부모님과 함께 놀이터를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눈결정체들이 마구 뭉쳐져 있는 듯한 아리고 시린 마음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눈사람은 녹지 말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녹지 않아야 자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부모님을 꼭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눈사람은 결심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눈사람은 이제 곧 다가올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허무하게 녹기 싫었다. 이렇게 계속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눈사람은 부모님을 결국 보지 못하고 녹아버릴 것이다. 이제 직접 부모님을 찾으러 나설 때가 되었다. 눈사람에게 자신을 만들어준 부모님을 찾는 것은 이번 겨울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마음이 담긴 물건이 필요했다. 하얀 숲으로 가려면 깊은 마음이 담긴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눈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런 물건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눈사람과 친한 아이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눈사람의 표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시무룩한 표정의 눈사람의 입은 마치 녹아내린 것 같았다. 입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나뭇가지가 이전보다 살짝 아래에 위치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깨달은 눈사람은 재빨리 억지로 미소 지어 웃어 보였다. 눈사람은 녹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수업시간으로 인해 텅 비어있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눈사람의 뒤통수 쪽에서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보아하니 분명 고민이 있는 아이의 발걸음 소리였다. 아이의 걸음걸이 소리가 멈추더니 철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눈사람은 망설였다. 아이에게 부탁을 해도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잠시. 눈사람은 저 아이가 자신을 도와줄 운명의 아이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졌다. 어쩌면 아이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자신의 고민도 도와달라고 얘기하면 될지도 모른다. 눈사람은 갑자기 뒤를 돌아 무작정 다짜고짜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도와줘!”
눈사람은 갑자기 아이를 향해 콩콩콩 뛰어가더니 아이의 품으로 뛰어올랐다. 아이는 땅을 보고 걷고 있는 바람에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허공에 뛰어오른 눈사람과 아이는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갑작스레 눈앞에서 무언가 뛰어올라 허공에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면서 붕 떠있는 물체의 정체를 자세히 보았다. 물체의 정체는 새 하얀 눈사람이었다.
눈사람은 넘어진 아이의 가슴팍에 안착하여 누워있는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이도 너무 놀라 눈사람을 계속 쳐다보기만 하였다. 눈사람은 마음이 조급해 아이의 가슴팍 위에서 뛰어오르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바쁘게 쏟아냈다.
“도와줘, 사람! 엄마, 아빠를 찾아야 해! 하얀 숲을 찾아가야 해!”
아이는 눈사람의 말에 황당하여있는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눈사람이 말을 하고 움직이다니. 난생처음으로 보는 장면이었다. 아이는 황당하여있는 표정에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변하며 넘어져 누워있는 상태로 계속 눈사람이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눈사람이 쏟아내는 말들은 분명 다른 눈사람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면 듣고 모두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아이의 고민이 아니라 눈사람의 고민을 아이에게 말하는 것은 분명 보통의 눈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젤리 눈사람은 자신의 고민에 조급해 그런 것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는 차가운 운동장 바닥에 누워있는 상태로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눈사람의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있다가 할 말을 다한 듯한 눈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눈사람이 말을 해?” 아이가 물었다.
“음… 나? 난 여기 마을의 젤리 눈사람이야! 모든 눈사람은 어린아이하고는 말을 할 수 있어! 너는 누구야?”
함께 대화를 나눌 친구들이 없었던 눈사람은 마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쏟아내었다. 아이는 눈사람이 하는 말에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눈사람이 학교를 다닌다? 우리 학교를 다닌다는 건가?
“나는… 담임 선생님이 누군데?” 아이가 대답을 하려다 말고 질문을 던졌다.
아이의 질문에 눈사람도 이해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담임 선생님?”
“네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며. 그럼 너도 담임 선생님이 있을 거잖아. 몇 학년 몇 반이야?”
“담임 선생님이 뭔지 잘 몰라. 네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여기 학교 앞 놀이터에서 엄마, 아빠가 날 만들어줬어.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여기 출신이지.”
“아~ 그렇네. 여기서 누군가 널 만들어줬으면 넌 여기서 태어난 거니까.”
“이제 말이 좀 통하네.”
아이는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눈사람의 묘한 이야기에 누워있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가슴팍에 무겁게 앉아있는 눈사람 때문에 숨이 잘 안 쉬어지는지 기침을 했다.
“저기 혹시 좀 내려가줄래? 무거워서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
“아, 미안해. 사람.” 눈사람은 아이의 가슴팍에서 내려와 대답했다.
“사람이 맞긴 하는데… 이름으로 불러주는 건 어때?” 아이는 눈가루가 묻은 점퍼를 털어내며 물었다.
“왜? 나는 눈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니까 눈- 사람이고, 넌 눈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은 그냥 사람이니까 사람이지!”
”나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있어.”
“이름이 뭔데?” 눈사람이 새초롬한 말투로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아이에게 물었다. 눈사람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특별한 이름이 있다는 얘기에 눈사람은 질투를 느꼈다.
“오준호. 그게 내 이름이야.”
눈사람은 부모님이 만들어준 이름이 있는 준호가 부러웠다. 자신에게도 그런 이름이 있을지 궁금했다. 유명한 캐릭터로 만들어진 인기 많은 눈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눈사람들은 아이들이 불러주는 이름이 있었다. 분명 저 아이도 사랑받는 아이이기에 이름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직 자신만 빼고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사람은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만이 눈사람이 기억하는 전부일뿐, 자신을 부르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면 어쩌면 아예 이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다시 눈사람은 시무룩해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치, 나도 이름 갖고 싶어…”
얼이 빠져있던 준호는 정신을 차리면서 이제 아예 양반 다리 자세로 고쳐 앉아 허리는 눈사람을 향해 기울인 채, 호기심 가득 찬 얼굴로 눈사람을 쳐다보았다.
“그게 네가 말한 고민이었어?”
바로 뒤에 학교 건물이 여전히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지만, 준호는 눈사람과의 대화에 빠져들어 자신이 학교 운동장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미술시간에서 있었던 일까지도 마치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 양 잊어버렸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아까의 일들은 벌써 머나먼 과거가 되어 있었다. 강한 호기심은 준호를 눈사람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눈사람은 자신의 혼잣말을 들은 준호의 대답에 약간 부끄러웠지만, 준호의 얘기에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 지 다시 생각이 났다.
“아니야. 아니야, 내 고민은 다른 거야. 나 좀 도와줄래?” 젤리 눈사람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물었다.
“뭘 도와달라는 건데? 일단 들어보고.”
눈사람은 준호의 대답에 그냥 말해서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가 나를 도와주게 만들 수 있을까? 눈사람은 최대한 불쌍한 모습을 보여 동정심이 들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사람은 젤리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눈결정체들의 힘을 모아 나뭇가지를 반대로 회전시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이제 잔나뭇가지의 양쪽 끝부분은 밑을 향해 바라보고 있어 입꼬리는 축 쳐져 보였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준호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곧 녹을 거야. 녹으면 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날 좀 도와줘.”
“눈사람은 원래 녹아 사라지는 거잖아?”
“어?” 눈사람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몬 젤리가 크게 확장되었다. “너무해!”
눈사람은 준호에게서 등을 돌려 울기시작했다. 눈사람이 울자 레몬 맛 젤리가 녹았고, 어느새 한쪽 젤리 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 아이들은 믿을만한 존재가 못된다. 눈사람들을 괴롭히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나 보다. 내 아까운 눈! 불쌍한 척하기 위해 움직이느라 녹은 약간의 눈이 아까웠다. 마음이 꽝꽝 얼은 저 놈한테 아까운 내 눈을 낭비하다니. 눈사람은 준호에게서 휙 등을 돌린 채 계속 울었다.
준호는 미안해졌는지 눈사람에게 다가가 레몬맛 젤리를 주워 눈사람에게 붙여주며 말했다.
“... 왜 안 녹고 싶은데…?”
“말했잖아. 녹으면 난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거야. 사라지고 싶지 않아!…그리고… 엄마, 아빠를 만나야 해!” 눈사람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그럼…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 건데?”
이제야 날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긴 건가? 눈사람은 금세 마음이 풀어져 울음을 그치고 준호를 다시 쳐다보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신중히 말을 골랐다. 눈사람이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상황은 정말 드물었다.
“내가 어렸을 때…킁! 부모님이 말해줬어…킁! 하얀 숲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눈사람이 하트 젤리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부모님? 네가 어렸을 때 하얀 숲으로?”
준호는 눈사람이 말해준 한 문장으로부터 호기심이 생겼다. 눈사람의 부모님은 어떻게 생겼을지, 사람처럼 생겼을지 아니면 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눈사람의 모습을 한 부모님 일지 궁금해졌다.
“응, 하얀 숲으로 찾아오라고 했어.”
“부모님이 있어?”
“응!!! 나도 부모님이 있어!!!” 눈사람은 다시 화가 나 몸을 돌렸다. 눈사람은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졌던 시간들에 대한 눈물이 서럽게 흘러내렸다. 어찌나 슬퍼하던지 눈사람의 머리 위에 있던 풀잎도 물에 빠진 것처럼 이파리들이 축 쳐져있었다.
“보여줄게!”
“뭘?”
“날 만들어준 사람들! 엄마, 아빠!”
갑자기 운동장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더 강해져 준호의 시야를 가렸지만 이상하게도 춥진 않았다. 눈보라는 준호의 모든 시야를 가려 준호는 팔을 휘적거렸다. 이제 눈보라가 끝난 것인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눈을 다시 떠보았더니 운동장에는 아까 전보다 더 높은 높이의 눈이 쌓여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찌 된 일인지 젤리 눈사람 외에 여러 종류의 눈사람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준호는 다시 울고 있던 젤리 눈사람에게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젤리 눈사람은 준호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대신 갑자기 여자 어른 한 명과 남자 어른 한 명이 준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른들은 이제 준호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이상하게도 얼굴은 가까이 있었지만, 흐릿하여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여자 어른이 다정한 표정으로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하얀 숲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찾아와. 그곳의 가장 오래된 나무 앞에서 우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하면 돼.”
이번엔 남자 어른이 역시 다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린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준호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모르는 어른들이 준호에게 얼굴을 들이밀더니 영원히 함께하자는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 왜 나무 앞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말해야 되는 거지?
어디선가 눈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잘 알겠지? 부모님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어때? 이제 알겠지?”
“네가 보여준 거야?”
준호는 이제야 왠지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눈사람은 준호에게 자신이 보았던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운동장을 둘러보니 다시 준호에게 익숙한 눈이 조금 녹아있는 운동장의 모습이 보였다.
“응, 당연히 내가 보여준 거지. 눈사람들은 환상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환상을 보여준 거야?”
“내 안에 눈결정체들이 환상을 만들어내는 거지.”
“우와, 너의 기억을 나한테 보여준 거라는 거지? 완전 마법 같아!”
“아이들이 눈사람들을 겨울마법사라고 부르기는 하지.” 눈사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아까 그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하얀 숲이라는 곳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를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응. 거기에 가면 하얀 숲이 소원을 이루어줄 거야.”
“우와,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응! 하얀 숲은 가끔 소원을 이루어줘. 하얀 숲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에게 소원을 빌면 엄마, 아빠랑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우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곳.” 준호는 곧바로 아빠 생각이 났다.
“응.”
준호는 다시 아빠의 생각들이 괴롭힐까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머리를 흔들어?”
“아니야. 음… 하얀 숲이라는 곳,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서? 어디서?”
눈사람이 통통 뛰며 준호에게 물었다. 눈사람은 속으로 자신의 감이 역시 틀리지 않는다며 좋아했다.
“잘 모르겠어…. 근데 어디서 들어본 거 같아.”
“마음이 담긴 물건도 가지고 있어?”
“그게 뭔데?”
“너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물건!”
“내가 아끼는 물건? 당연히 있지!”
“와! 마음이 담긴 물건이 하얀 숲으로 가는 열쇠가 되어줄 거야. 그것만 있으면 돼! 그것만 있으면 소원을 이루러 갈 수 있어!”
준호에게는 아빠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나도 가면 소원을 들어줄까?”
“아마도?”
“그럼 내가 도와줄게! 찾아보면 될 거야! 집에 가서 찾아보면 뭔가 나올지도 몰라!”
눈사람은 준호의 말에 기뻐서 몸을 통통 뛰며 말했다. “정말? 정말? 정말이지?”
“정말이지. 나도 거기서 소원을 빌어볼 거야. 일단… 추우니까 같이 우리 집으로 가자!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잖아.”
“너네 집으로? 난 항상 이곳에 있었는데…”
눈사람은 갑작스레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준호의 말에 두려움을 느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상상은 매일 하는 상상이었지만, 한 번도 이곳을 떠나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 하얀 숲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꼭 이곳을 떠나야 했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태까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오고 가는 것만을 바라보았다. 이제 눈사람도 직접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었어도 말은 다르게 튀어나왔다.
“괜찮을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무서워…”
“괜찮을 거야. 내가 널 돌봐줄게.” 준호는 무서워하는 눈사람을 달래주었다.
눈사람은 두려웠지만, 준호의 말에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용기를 내야 할 때라고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두려움에 떨며 운동장에 혼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눈사람은 비장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눈사람의 대답과 함께 머리에 달려있는 한 가닥의 풀잎이 왠지 더 푸르고 생기 있어져 보였다.
준호는 자신의 무릎 정도 높이에 오는 눈사람을 들어 올렸다.
“어때? 괜찮아?”
“응. 괜찮아. 나 떨어뜨리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준호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눈사람은 드디어 하얀 숲으로 갈 수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기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눈사람은 숨길 수 없었다. 시무룩해져 있던 머리 위의 새싹은 어느새 힘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파릇파릇해져 있었다.
준호는 젤리 눈사람에게 분명 낯선 존재였지만, 왜인지 금방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운동장에서 많은 아이들을 보았지만, 눈사람은 준호에게서 무언가 특별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