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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laire 북클레어 Oct 26. 2024

[소설] 4부. 스파이 상우


눈사람들에 따르면 

하얀 숲은 초대를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숲의 초대는 눈사람을 통해서 또는 정말 가끔 영혼의 염원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준호가 미술시간에 학교를 박차고 나간 후, 벌써 몇일이나 지났지만 준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반 아이들은 준호가 어떤 일 때문에 갑자기 수업시간 도중 왜 뛰쳐나갔는지, 왜 아직까지도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인지 에 대해 궁금해했다. 준호가 사라지면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올 줄 알았던 상우는 준호가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받게된 상황에 짜증이 났다. 도대체 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다고.


도대체 왜 다들 준호를 찾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여러 면으로 보나 상우는 준호보다 키도 크고 잘생겼으며 공부도 훨씬 더 잘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상우는 리틀 차은우라고 불리며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상우를 아는 사람들이 상우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상우가 또래보다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들의 나열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상우를 처음 만났을 때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시간이 지날수록 상우에게 무관심해졌다. 상우를 잘 모르는 여자아이들은 상우를 좋아했지만, 친구들은 상우와 별로 같이 놀고싶어하지도 않았다. 친구들이 상우에게 가지는 관심은 유행하는 장난감들에게 가지는 정도뿐이었다. 오히려 점점 뒤에서 상우를 재수없다거나 무엇을 하든 과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만 늘어갔다.


선생님들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좀 더 예뻐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상우에게 가지는 관심은 아니었다. 상우가 예쁘게 생겼으며 모범적이고 말을 잘 따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선생님들이 해야하는 일들에 대해 상우가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오늘 선생님이 상우를 부른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였다. 


선생님은 왜 아무런 연락도 없이 몇일이나 지났는데도 준호가 왜 학교에 오지 않는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있는 상우에게 찾아가보라고 했다. 선생님의 말로는 준호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여태까지 학교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고, 아마 미술시간에도 부모님 얘기가 나와 그런 것 같다며 그래도 가장 친한 상우가 가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이제서야 상우도 준호가 왜 혼자 그렇게 뛰쳐나갔는지 알 것 같았다. 묘한 동질감의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상우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선생님은 아직도 준호와 상우가 항상 붙어다니는 줄 아는지 상우의 거절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눈치였다. 선생님의 말씀에 상우는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이유를 설명해줄 수도 없었다. 거기다 아무이유없이 거절을 한다면 여태까지 상우가 쌓아온 상우의 이미지에도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상우는 학교수업이 모두 끝난 후, 엄마에게 얘기하지도 않은 채로 학원 대신 몰래 준호네로 가기로 했다.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수업이 끝나자마자 준호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준호가 사는 집의 문이 눈 앞에 있었다. 오랜만에 눌러보는 초인종이었다.  준호와 함께 놀던 예전 기억들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초인종 소리가 크게 복도에 울렸다. 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준호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건가? 상우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상우는 준호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 같아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오준호! 나와!” 


상우는 문고리를 잡고 확 열어보았다. 어? 문이 열렸다. 마치 상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문은 열려있었다. 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발걸음을 옮겨 준호네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곳에는 준호와 다른 무엇이 있었다. 상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저번에 보았던 눈사람이었다. 


준호와 눈사람은 무언가를 바라보며 얘기하고 있어 상우가 집안에 들어왔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준호와 눈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추운 겨울 집안에 야자수가 있는 반짝이는 멋진 해변가의 모습이라니. 


상우의 눈 앞에는 말도 안되는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집안에 흩날리고 있는 눈송이들과 현실처럼 펼쳐져있는 이상한 것들이 아른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혹시나 꿈을 꾸고있는 것인지, 볼을 꼬집고 허벅지를 때려보았다. 그래도 눈 앞에 있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비비기도 하고, 이 각도, 저 각도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상우는 이제 눈 앞에 있는 것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존재하는 것이고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를 생각했다.


준호가 예전에 말했던 마법을 부리는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준호가 매일 말하던 해리포터라는 옛날 소설책이라는 것이 사실은 준호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준호가 살고있는 마법세상의 이야기! 그렇다면 준호는 마법사인 것이다!


상우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준호와 눈사람을 눈을 크게 뜨고 더 자세히 관찰했다. 하지만 마법을 부리는 사람의 손끝은 준호가 아니라 눈사람이었다. 눈사람의 앙상한 나뭇가지 팔로 지휘자처럼 휘두르면 그 곳에서 반짝거리는 하얀 눈송이들이 나와 이상한 것들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상우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이해가지 않았다. 어쩌면 준호가 아니라 저 눈사람이 마법같은 것을 부려 이 모든 것들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사람이 지휘자처럼 나뭇가지 팔을 휘두를 때마다 눈송이들을 휘날리며 상우가 있는 곳까지 해변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상우는 저 눈사람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준호는 여태까지 저 눈사람 때문에 인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사람의 마법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준 것이다. 그래서 준호는 그렇게 덜떨어져있더라도 엄마, 아빠 그리고 친구들에게까지 사랑을 받고있던 것이다. 어쩌면 눈사람은 상우가 원하는 것 모든 것들을 이루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소원도 들어줘!”


상우의 외침에 눈사람과 준호는 깜짝 놀라 넘어졌다.


“아, 깜짝이야.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문이 열려있었어.”


“뭐하고 있었던거야?” 상우가 따지듯이 의심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그냥…”


“눈사람이 마법으로 환상을 보여주고 있었던 거잖아. 그렇지?”


“그런 거 아니야.” 준호가 눈사람 앞을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그럼 뭔데. 설명해봐.”


우물쭈물하는 준호의 모습에 상우가 다시 요구했다.


“내가 보고싶은 환상도 보여줘.”


눈사람이 기분 나쁘다는 듯 상우에게 맞서 얘기했다.


“어차피 넌 내 친구도 아니잖아. 내가 왜 보여줘야 되는데!”


상우는 눈사람의 말에 화가 났다. 친구가 아니라는 말에 화가 났다.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라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수치스러웠고, 그 수치심은 상우를 화가 나게 만들었다. 갑자기 성큼성큼 화장실을 향해 들어갔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수도꼭지를 가장 뜨거운 곳으로 맞춰놓은 후,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는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왔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눈사람에게 말했다.


“자, 내가 보고싶은 환상들을 보여줘.” 상우는 다시 눈사람에게 요구했다. 


“싫어! 난 하얀 숲으로 가야해.” 


상우는 하얀 숲으로 가야한다는 눈사람의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상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마법을 부리는 눈사람이란 이제 그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장난감 정도 일 뿐이었다. 


“너가 준호한테 보여주는 거! 나한테도 보여줘!” 


“싫어!”


“왜 준호한테는 환상을 보여주고 나한테는 안보여주는건데!” 


상우는 준호에 관한 생각이 날 때마다 짜증부터 났다. 준호는 상우가 가지지 못하는 모든 것을 가진 아이였다. 상우가 가진 모든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총체였다. 상우의 마음 속 상자에 꾹꾹 눌러넣은 상처를 자꾸 꺼내 확인하도록 만 들었다. 상우의 열등감 제조기. 


“너가 누군데! 준호는 내 친구란 말이야!” 


상우는 눈사람을 번쩍 들어 화장실로 데려갔다. 


“뭐하는 거야!” 준호가 소리치며 상우를 뒤따라갔다. 


“보여줄래? 아니면 뜨거운 욕조에 들어갈래?”


“갑자기 뭐하는거야?”


상우는 양손으로 눈사람을 높이 들어올렸다. 


“뭐하는거야!!!” 준호가 상우를 말리려 팔을 뻗어보았지만, 키가 훨씬 큰 상우를 상대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눈사람은 상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앙상한 나뭇가지 팔로 상우의 얼굴에 휘둘러봤지만, 허공에 팔을 휘두르는 격이었다. 눈사람이 팔을 휘두르다가 상우의 볼에 상처가 났다. 맞았다는 생각에 더 화가 난 상우는 눈사람이 욕조 위에서 내뿜는 뜨거운 온기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마치 빠뜨릴 것처럼 시늉했다. 


“얼마나 뜨거운지 벌써 느낄 수 있을거야.” 


“도대체 뭐 하는거야!” 준호는 눈사람이 떨어질까 팔을 최대한 쭈욱 뻗어 받치고있었다. 


“뜨거워! 난 녹기싫어! 녹기 싫다구!”


“내가 널 여기에 빠뜨리면 넌 바로 녹아서 사라져 버릴거야. 녹기 싫으면 뭘 해야겠어?” 


“환상을 보여줘야 해...” 눈사람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앞으로 준호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만 들어야해.” 


눈사람은 상우가 다시 거실로 데려왔음에도 계속 두려움에 떨고있었다. 눈사람 머리 위 작은 풀잎들도 서로에게 기대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눈사람은 상우가 원하는 환상을 보여주기로 했다.  


상우는 눈사람을 거실에 두고는 잠시 어떤 환상을 볼까 고민을 해보았다. 어떤 환상이 보는 것이 재미있을까. 상우는 평소에 좋아하던 게임을 떠올렸다.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플레이 해본다면 그만큼 재밌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준호처럼 멋진 환상을 볼 수 있어?” 


“너가 보고싶은 환상을 마음 속으로 그리면 돼.” 눈사람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나는 포켓몬 게임에서 완전 쎈 레벨 높은 포켓몬을 다 잡은 환상을 보고싶어. 그리고 음….”


눈사람은 상우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아름다운 눈을 흩날렸다. 집안은 온통 보라색이 주를 이루는 오로라 빛이나는 눈가루로 가득 찼다. 눈가루는 작고 느린 회오리들을 만들며 퍼져나가 집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여 거실에는 작은 반구의 눈결정체들로 이루어진 돔이 생겼다. 


상우는 회오리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신을 둘러싼 돔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오로라는 사라지고 안개만이 남아 바로 앞조차도 볼 수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면서 안개도 점차 사라져갔다. 사라져가는 안개 사이로 누군가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보였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포켓몬이 아니라 커다란 ‘사람’이었다. 아니면 사람같이 생긴 포켓몬인가? 그런 포켓몬이 있었나? 


누군지 모를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보자 상우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 눈사람이 만든 환상이 맞는걸까? 안개 속 커다란 사람은 상우를 향해 돌아보려 하였다. 도대체 뭐지? 누구인거지? 상우를 향해 돌아본 사람은 상우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돌아볼 때, 안개는 모두 걷혀있어 상우는 아버지의 얼굴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상우는 놀란 마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있던 점을 따라가며 살펴보았다. 아버지 턱에 있던 점. 볼에 있던 점. 오른쪽 눈꺼풀에 있던 점. 눈사람의 환상은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오똑한 콧날과 남성스러운 턱까지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었다. 


아버지의 옷을 보니 아버지는 상우가 본 마지막 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거실 한 가운데에 떡하니 서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예전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상우는 맞닥뜨린 낯선 상황에 말이 나오지않았다. 너무나도 진짜 같은 이 상황에 몸이 굳어버렸다.


상우는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꼭 저주의 말과 욕을 퍼부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환상에 지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상우구나. 오랜만이야.” 


아버지는 미소지으며 상우에게 먼저 말을 건네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해주었다. 


“보고싶었단다.” 


어렸을 때 수만번 생각했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다.


상우는 눈으로 만들어진 아버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다정하게 웃는 모습에 상우는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이해가지 않았다. 분명 화가 나야하는데, 자꾸 반가운 마음이 불쑥 생겨버렸다. 상우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보아도 여태까지 하고싶었던 저주의 말들은 굳어버려서 입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빠가 떠난 뒤로 수만번 읊조리던 말들이 상우를 보며 빙그레 미소짓는 아빠의 얼굴을 보자 모두 녹아버렸다. 


상우는 더 이상 아버지가 보고싶다거나 바라는 것 또한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에게 가진 감정은 분노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어렸을 때의 상우처럼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만난 아버지를 본 순간, 상우의 마음은 상우를 배신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보고 싶어하는 환상이 아니야. 어떻게 좀 해봐!” 상우는 눈사람과 준호를 쳐다보며 외쳤다.


“거짓말하지마. 아빠는 우리를 보고싶어한 적도 없잖아. 아빠가 우릴 사랑했다면 떠나지도 않았을 거야!” 


이번에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아빠를 향해 소리쳤다. 자신을 버린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화가났다.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상우야, 아빠는 너가 매일 그리웠어.” 


“거짓말 그만해! 매일 그리우면 왜 떠나! 왜 연락도 없어! 말도 안돼! 왜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는거야!” 


상우는 귀를 막고 악을 쓰며 더 크게 소리쳤다. 


한참 동안이나 소리를 지르다가 집에 있는 물건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상우는 아직도 아빠에게서 보고싶어한다는 말을 듣고싶어하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화가 났다. 너무 큰 감정의 분노였지만, 그 분노는 자신을 향하고 있어 어떻게 할 수 없어 더 답답했다. 


물건을 던지고 있는 상우에게 상우의 아빠를 닮은 환상이 다가왔다. 아빠는 귀를 막은 상우에게 가까이 다가와 귀를 막고있는 상우의 손을 잡아주었다. 상우는 형체가 없는 손의 차가운 기운만을 느끼며 아빠의 눈을 쳐다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정말 살아있는 아빠가 돌아와 상우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빠의 눈은 상우를 바라보던 예전의 그 눈이었다. 상우는 한참동안이나 아빠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곳에서 상우는 무슨 일인지 아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만질 수는 없었다. 손은 아빠를 뚫고 아빠의 형상 안으로 들어가버려 자신의 귀에 손을 대고 있는 손처럼 차가운 눈결정체의 수증기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만해…!”


상우가 준호와 눈사람쪽을 쳐다보며 마치 무서운 유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소리쳤다.


“너네가 짠거지! 너네가 일부러 나한테 복수하려고 그런거지!”


상우는 화가 나 준호를 밀쳤고, 준호는 넘어지면서 책장에 부딪혔다. 


“내가 보여주는 게 아니야….” 눈사람이 두려움에 떨며 준호의 다리에 찰싹 붙어 말했다.


“어떻게 좀 해봐!” 상우가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눈사람은 이제서야 손짓으로 환상을 거두어냈다. 상우는 털썩 주저앉았다. 혼란스러워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본 준호에 대한 수치심도 끌어올랐다. 계속 머리를 부여잡더니 상우는 이 모든 상황은 눈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서는 돌연 이 모든 일들이 눈사람이 만든 환상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했다. 


다시 화가 난 상우는 눈사람에게 따졌다.


“왜 갑자기 아빠가 나한테 보고싶다고 말하는거야? 너가 일부러 이렇게 만든거야? 우리 아빠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난 너가 보고싶은 환상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야. 너의 마음이 만든거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 마음은 이런 걸 원하지 않아! 난 더 이상 보고싶다는 말 듣고싶어하지 않는다고!” 


상우는 눈사람이 보여주는 인정할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해 계속해서 눈사람에게 화를 냈다. 아버지를 보고 반가운 자신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눈사람을 탓해야 했다. 눈사람을 탓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의 화살은 상우 자신에게 향해야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게 되면, 비참해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바라는 사랑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특히 그 대상이 당연히 나를 사랑해주어야 할 부모님의 경우가 그렇다.


사람들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떠든다. 부모의 사랑은 끝이없는 내리 사랑이라며 자식들은 이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알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상우에게 이런 말들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떠들어대는 것이 짜증나고 싫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지못하는 멍청한 사람들이 싫다.


상우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닫아버린 마음은 스스로 그 마음을 알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라는 사실이 괴로웠고, 자신의 마음을 준호에게 들켰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모든 것을 들켜버린 상우는 준호와 눈사람이 보든 말든 크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준호와 상우는 유치원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언젠가부터 둘의 사이는 멀어졌었다. 상우가 갑자기 툭하면 짜증을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곤 했고, 상우의 그런 이상한 행동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랐다. 준호는 여태까지 상우의 이상한 행동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준호는 상우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눈사람과 함께 자리를 비어주었다.


시간이 한참 흘렀고, 그 동안에도 상우는 계속해서 울고있었다. 그런 상우에게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하얀 숲으로 가는 방법을 찾았어. 너도 같이 가자. 거기에 가면 소원을 들어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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