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2020년, 누군가에겐 위기일 수 있겠지만 내겐 그 어떤 해보다 값진 휴식의 기회였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29년 동안 가장 큰 환경의 변화의 시기였고, 덕분에 여러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던 건 확실하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외국계 해외취업, 다양한 국적 친구들과 일할 수 있는 글로벌한 환경 , 전 세계를 무대로 일하는 소위 글로벌 여성리더들에 대한 로망과 꿈을 가지고 있었고 , 생각대로 된다는 말처럼 정말 내가 꿈꾸고 생각한 여성의 모습처럼 한 단계씩 성장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글로벌 마케팅부로 입사해서 한중 리포터, 아이돌 중국어 강사 , mcn활동을 하게 되고 퇴사와 동시에 외항사 승무원까지 언어와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며 정말 원했던 글로벌한 꿈과 삶을 개척해 나가며 그 안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단언컨대 승무원 생활은 나의 인생에서 나라는 사람을 가장 빛내준 최고의 시간이었고, 내 인생의 황금기이자 젊었을 때 누릴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 꿈의 직업이었던 건 확실했다.
몇만 명의 경쟁자들을 제쳤다는 뿌듯함과 외국계 대기업에 다니는 자부심, 동기와 선배라는 명목의 항공사 특유의 소속감, 같은 또래들에 비해 높은 연봉과 자유로운 근무환경, 그리고 매일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전 세계를 무대로 여행할 수 있는 설렘까지.
오롯 나의 노력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결과물이었고 나름 인생의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 또래 주변 그 어떤 친구도 부럽지 않았다. 힘들 만큼 힘들었고 또 그만큼 누린 행복도 컸으니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면접 준비를 했고, 힘든 교육 생활을 버텨내서 정식 승무원이 되었을 때 그 후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인생은 고진감래처럼 ,
고생 끝 낙 이 온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매일이 꿈만 같은 시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불안정한 타지 생활과 불규칙한 스케줄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고 , 쉬는 날에도 울리는 업무공지와 엄격한 각종 규정 때문에 하루도 맘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가족이 그리웠고 , 나도 한국에서 남들 다 하는 연애도하면서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 졌다. 너무 간절했던 걸까
스물아홉 , 아홉수가 되던 해. 경자년 2020년.
코로나라는 역병이 돌기 시작했고 , 더이상 일을 하지 않게 됬다. 처음엔 너무 좋았다. 이참에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며.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인지 가족들과 자주 충돌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로 서로 상처주기 일쑤였다. 그땐 왜 몰랐을까.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더 찢어질 듯 아팠다는 걸. 남들이 툭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괜히 예민해지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어졌고 그래서 같은 처지에 있는 동기들과 자주 만났는데, 그렇게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늘 걱정과 고민에 가득 찬 나날뿐이었다.
하지만 , 인생은 어차피 고진감래.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고, 비가 온 뒤엔 땅이 굳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듯한 봄이 찾아오듯 , 봄날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쉼'이라는 시간 속에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도전하며 내적 변화도 생겼고 , 오랜 시간 비행을 하지 않으니 외적으로도 큰 변화가 생겼다.
두꺼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니 피부가 좋아졌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언제든지 약속 잡고 만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들이 생겼고 , 더 이상 새벽마다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지 않아 행복했다. 무엇보다 늘 무거웠던 3중의 캐리어와 꽉 끼는 유니폼, 탈모를 유발했던 어피어런스, 틀에 박혀있는 지정 네일을 피하니 전체적으로 몸이 건강해졌고, 제때에 밥을 챙겨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하니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답답한 호텔 생활을 비롯한 타지 생활에 마침표를 찍자 불안정했던 나의 삶이 점점 안정된 삶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이번을 계기로 더 이상 내 인생에 타지 생활은 하지 않기로.
매일 공항으로 향하던 새벽 출근길엔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도 만날 수 있었고, 하루 종일 꼭 대단한 걸 이루지 않아도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왜 그땐 몰랐을까. 조금만 고개를 돌려봐도 예쁘고 아름다운 게 많았는데 너무 빨리 가려다 보니 멋진 풍경과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일상의 소중함을 모른 채 작은 소확행 하나 즐기지 못했던 지난날의 바쁜 삶이 원망스러웠다. 이토록 앞만 보고 살아왔구나. 참 긴장하며 살았구나 나.
그런 면에서 아홉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면서 삶의 여유가 생겼고 , 눈으로 마음으로 담을 수 있는 것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시간들이었으니까. 10이라는 완성의 나를 위해 잠깐 쉬었다 가라는 인생의 작은 쉼표가 되어주었으니까.
지난날보다 더 행복한 지금이다.
그래서 난 믿는다.
힘든 일 뒤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순 없지만, 살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불행이 닥치기도 하고 원치 않는 선택의 순간이 늘 놓이기 마련인데, 그 어느 누구도 고꾸라지지 않는 평탄한 인생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로 삶이란,
‘어떻게 하면 넘어지지 않을까’
가아닌, 뜻하지 않게 넘어진 이 순간을
‘어떻게 하면 다시 잘 일어서느냐’
가 중요하다는 것.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곧 다가올 서른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기만 했는데, 잘 일어서는 법을 알려준 '인생의 쉼표'라는 시간 덕분에 새로운 출발선 앞에 있는 지금 이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설레고 뿌듯하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했던 승무원 생활이 좋았어요. 힘든 일도 많았지만 승무원이란 직업을 선택한 것에 단 1프로의 후회도 없으니까요.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했고 다시 태어나도 해보고 싶은 최고의 직업이자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인생의 황금기를 만들어준 직업이었어요.
하지만 다시 돌아가진 않을 것 같아요. 이젠 그동안 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려고요. 쉼표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향해 도전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해 나갈 거예요.
제 글을 읽고 있는 귀한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나아가 혹은 아홉수라는 아픈시기를 겪고 있는 모든 분들께도 ‘쉼표’라는 시간을 통해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내 마음을 다시 재충전하시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날이 찾아오길 희망합니다.
봄날은 생각보다 멀리있지 않더라구요
쉼표는 마침표가 아니다.
쉼표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일뿐!
비행은 끝났지만
오늘도 나는 새로운 꿈을 꾸고
또 다시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