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승무원 Nov 18. 2020

승무원 면접만 합격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직업의 양면성

어렵다는 승무원 합격에 합격만 하면 아무 걱정 없이 탄탄대로 살 줄 알았다. 연애도 자유롭게 할 줄 알았고 , 면접 때처럼 고군분투하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도 없을 줄 알았다. 승무원을 준비하는 준비생들 대부분이 그렇듯 단정하고 세련된 유니폼을 입고 멋지게 공항을 거닐며 이나라 저나라를 여행하고 비행하는 나름 프로페셔녈한 모습의 나를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화장을 하고 어느덧 작업복이 되어버린 유니폼을 입고 무거운 짐을 이끌고 집을 나선다.


머리가 헝클어지면 안 되니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공항버스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약 한 시간을 달린다. 조금 잠을 청하려고 하면 어느덧 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가장 싫은 순간이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알코올 검사를 한 후 쇼업실에서 이름 체크를 하고 있으면 하나둘씩 비행할 선배님들이 들어오신다. 연신 허리를 구부려대며 인사를 하고 난 후 같이 가는 선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혹여 실수는 하지 않을까 눈치보기 바빴고 , 기내에 탑승해서는 '내'일보단 '선배'님의 일을 먼저 도와드리는 동방예의지국의 후배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매항편마다 각자 정해진 듀티와 구역이 있기 때문에 비행 도중 아무리 머리가 어지럽고 배가 아파도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일처리를 해줄 수 없는 노릇이고 , 힘들다고 당장 병가를 쓰거나 조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레이오버 때마다 해외체류지에서 사 온 온갖 유명하다는 상비약을 꺼내 착륙 전까지 무사히 별 탈 없이 아프지 않기 많을 바랄 뿐. 12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의 경우엔 기조가 돌아가면서 순환근무를 하는데 불이 다 꺼진 채 손님들이 다 자고 있는 시간에도 눈을 붙이긴 힘들다. 규정상 춥다고 담요를 덮을 수 없고 코트를 입을 수도 없다. 오들오들 떤 채로 따듯한 물통을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차가운 손과 다리를 녹이는 꼴이 라니. 예뻐 보이던 유니폼은 더 이상 유니폼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작업복일 뿐이다.


허벅지와 배를 쪼여오는 압박스타킹 덕분에 아까 먹은 기내식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스르르 배가 아파오기 시작하니 다시 가방을 뒤적이며 소화제를 먹는 일도 다반사. 건조한 기내 덕분에 비싼 에센스를 듬뿍 발라놔도 피부는 이미 쪼글쪼글한 주름으로 가득 잡혀있고 눈은 뻑뻑해 속눈썹과 함께 말라비틀어지기 일보직전이다. 다시 덕지덕지 수정 화장을 하며 거울을 보는데 오 마이 갓 집 밖을 나왔을 때의 초롱초롱했던 내 모습은 어디 가고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온 잔망스러운 잔머리에 , 퀭하고 내려온 다크서클을 보니 피폐해진 거지가 따로 없다. 벙커(승무원들이 자는 곳)는 또 어찌나 작고 답답한지 세상 모든 묵은 먼지 떼가 다 여기 붙어있다. 감기는 덤일 뿐

기내에서 가장 더러운곳 벙커!(몇년내내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모든 직업엔 양면성이 존재하듯 , 우리의 직업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극 그 자체다. 모든것엔 명과 암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여전히 승무원을 준비하는 사람들 아니 몇 년 전의 나도 이 직업이 이토록 성가시고 힘든 일이란 걸 알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할 수 있었을까.


"승무원은 무조건 예쁘면 되는 거 아니야?
승무원 중에 머리 빈 애들 많잖아 "


비단 승무원 이외에도 세상엔 더 어렵고 힘든 일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유난히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예쁘고 몸매만 좋으면 , 비주얼만 되면 '아무나' 되기 쉬운 직업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 같다. 스터디 당시 누가 봐도 화려하고 예쁜 연예인급의 지원자를 봤다. 당연 그 친구는 프리패스로 합격할 줄 알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알바를 하며 준비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 예쁜 미모에 연영과를 졸업해 현직 배우를 하고 있는 친구도 첫 면접에서 탈락을 하기도 했다. 면접은 '연기'라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항공과를 나왔고 어느 정도 스펙에 누가 봐도 승무원 이미지인 친구가 있지만 그 친구 역시 매 채용마다 탈락의 고비를 마셨다.

남이 봐도 소위 멋있어 보이는 직업은 내가 봐도 해보고 싶고 , 진입장벽이 낮은 직업일수록 그만큼 경쟁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소위 어디 가서' 예쁘다 '라는 말을 들어온 여자들이 뭉쳐 너도나도 해보겠다고 지원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쁜 여자 10명 아니 100명중에 한 명만 뽑히는 게 바로 승무원 면접이다. 면접장은 자신의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듯 뽐내러 오는 곳이 아니고 , 수많은 지원자를 봐온 현직 면접관이 바라보는 기준은 결코 단순히 외모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외모도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 나예쁘죠? 빨리 뽑아요'가 아니라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호감 가는 인상'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


지금의 내가 면접관이 되어 지원자를 뽑는다면 찰나의 몇 분이지만 대충 느껴질 것 같다. 단지 직업 그 자체에 환상이 있는 사람인지 , 외모에 대한 높은 기대와 자신감으로 그냥 한번 궁금해서 보러 온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 하고 싶은 '이유'가 있는 사람인지.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무조건 예쁘다고 입사하기 쉬운 회사도 아녔을뿐더러 , 각 유명 해외대를 졸업하고 몇 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언어 능력자도 많았고 , 서비스업인 만큼 이미 이 분야의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가진 동기들도 많았다. 인품이 훌륭한 동기도 있었고 , 꼭 이직업이 아니어도 큰 회사에 들어갈 만큼의 유능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동기들도 많았기에 이 세상에  '아무나' 하는 직업은 없다.

면접을 합격하고 교육을 받고 , 새로운 세계에 입성하여 새로운 룰을 따르며 때로는 내가 원하던 이상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하기 싫은 일에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변해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정해진 틀 안에서 나름의 내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합격만 하면 다 될줄 알았던 마냥 순수했던 그 시절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열정 가득한 그때 그 시절


             순수하게 빛났던 그때의 내 모습이

                 너무나 그리운 요즘이다

이전 14화 우루무치 비행, 나를 꼭 보내야만 했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