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평소 패셔너블한 감각으로 뭇 여성은 물론 옷 못 입는 남성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인 그 녀석. 가로수길 퓨전음식점 앞에서 만난 그는 블랙과 그레이톤으로 시크하게 차려입은 니트웨어와 블랙진 룩을 워크부츠로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부츠가 예뻐 물어봤고, 이내 '닥터마틴 1460 모노'라는 답을 듣게 됐다. 우와 요즘도 닥터마틴을 신는구나?
닥터마틴의 대표적인 제품인 1460은 처음에는 질기고 튼튼한 신발이 필요했던 노동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워크부츠다. 특히 당시 혁신적이었던 공기쿠션 밑창은 기존의 부츠보다 편안한 착용을 제공했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1970년을 지나면서 당시 노동계급적이었던 스킨헤드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됐으며, 전설의 기타리스트 '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가 1460 부츠를 신고 무대에 오르자 닥터마틴은 비주류와 서브컬처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공연 중 기타를 부셔버릴 정도로 과격하고 즉흥적인 타운센드가 닥터마틴이라는 브랜드에 반항적인 록, 펑크문화 이미지를 완성시킨 격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1460 부츠는 어떠한가? 편안함으로 유명했던 그 부츠는 이제는 무겁고 딱딱한 신발이라는 반세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평을 듣는다. 하지만 닥터마틴은 1460의 본질을 바꾸는 것을 거부한다. 보다 가벼운 부츠도 나오긴 했지만 클래식에 대한 자부심 덕에 본질은 그때 그 워크부츠 그대로다. 대신 반항과 혁신을 대표하는 1460은 자신의 몸을 까만 도화지로 만들었다. 인기 애니메이션 '어드벤처'나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물론 락클럽 'CBGB', 럭셔리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와도 손을 잡고 까만 워크부츠 위에 흥미로운 반항정신을 그려나가는 것이 바로 닥터마틴의, 닥터마틴 다운 해법이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展 @롯데뮤지엄 ⓒ 2020, 구잘트
올해 국내 미술계 최대 이슈 중 하나인 '장 미쉘 바스키아'전을 보기 위해 롯데 뮤지엄을 방문했다. 전시를 보고 나오던 길에 들른 몰에서 바스키아의 상징 중 하나인 공룡과 왕관이 그려진 1460 부츠 디스플레이가 보였다. 탄성이 나올 정도로 예쁜 이 워크부츠는 키즈 전용 상품이라고. 하얀 부츠 위에 그려진 바스키아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오래간만에 결이 맞는 콜라보가 나왔구나 싶다. 왜 성인 제품은 없나요? 폰을 꺼내 검색해보니 어른을 위한 부츠는 이미 글로벌리 동이 난 듯싶다.
올해는 1460 부츠가 출시된 지 60년이 지난 해라고 한다. 닥터마틴은 계급 탄압과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했던 바스키아의 정신과 닥터마틴의 1460 부츠가 지닌 상징적 의미의 합치를 기념하며 그에게 하얀 도화지를 남긴 것은 아닐까. 친구 녀석이 신었던 1460 부츠를 다시 떠올려본다. 닥터마틴의 상징인 노란 스티치와 힐루프의 'AirWair' 레터링이 모두 블랙으로 시크하게 바뀌어있었다. 어느덧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반항과 혁신의 아이콘 닥터마틴. 그의 조용한 반항은 계속되고 있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무제(Untitled,1982)> ⓒ Jean-Michel Basquia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1050만 달러(한화 약 1,247억)에 낙찰된 바스키아의 <무제(Untitled)>
악습을 거부했던 그에게 붙은 별명, 검은 피카소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팝 아티스트다. 29년의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난 작품들과 그 작품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그라피티 문화를 기반으로 한 팝 아티스트였기에, 우리는 주변에서 손쉽게 그의 작품이 프린트된 티셔츠와 각종 소품을 만날 수 있다. 유니클로에 양말 사러 갔다 그의 작품이 그려진 티셔츠를 집어 오기도 했고, 1000%짜리 베어브릭에 얹어진 '카브라'가 갖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앤디 워홀이나 키스 헤링과 함께 예술의 대중화를 이끌어 오고 있으며, 현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찌나 유효한지 국내의 기업 중 하나는 '장 미쉘 바스키아'라는 골프웨어 브랜드를 론칭하기에 이를 정도니까.
장 미쉘 바스키아를 보면 조기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바스키아를 데리고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당시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있을 때였으니. 공교롭게도 그의 작품에는 큐비즘의 특징인 다(多) 시점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게 다 엄마 덕인 것이다. 그녀가 1968년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바스키아에게 해부학 입문서인 '그레이의 해부학' 책을 읽게 했다는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9살 아이에게는 좀 과한 책인 것 같으나, 착하고 똑똑한 아들 바스키아는 열심히 읽고 해부학적인 지식과 영감을 머리와 가슴에 가득 채워버리는 천재적 면모를 드러낸다. 이 자극 또한 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수많은 해골과 뼈과 근육들이 그의 언어가 된다.
SAMO의 마지막 그라피티 작품
그는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의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만든 그라피티 그룹 'SAMO'(세이모, Same Old Shit, 오래된 건 모두 다 개똥 같다는 뜻이다.)를 만들어 뉴욕 전역을 누비며 그의 존재감을 알리고 이내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뱅크시처럼 미술 시장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친구와는 달리 너무나 유명해지고 싶은 바스키아는 SAMO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 미술계의 중심을 향해 달려간다. 당시 미국 미술계는 유럽과 예술역량으로 맞먹기 위해 이를 실현해준 새로운 미술 스타에 목말라 있었다. 인생은 타이밍, 이런 상황에서 잭슨 폴록의 뒤를 이어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미술 언어를 들고 나온 바스키아는 환영받아 마땅했다. 게다가 흑인이라니!
그는 단숨에 미국 미술계의 슈퍼스타가 된다. 이내 앤디 워홀을 만나고 그는 고산증에 대비하지도 못한 채 저 높은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된다. 너무나 빠르게 오른 정상에서, 귀가 먹먹해지고 숨도 쉬어지지 않는 상태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림을 연주하는 이 세기의 천재를 시장은 너무 부추겼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 그의 다음은 끝없는 슬픔과 허무의 절벽이었을 것이다.
흑인 예술가로 인종 차별, 악습과 규제에 반항하며 희망을 연주했던 바스키아. 자신을 흑인 예술가로 분류하길 거부했고, 자신 그 자체가 전설이라며 경계를 부숴나갔던 그에게 붙은 별명은 아직도, 그리고 오늘도 '검은 피카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