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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Jul 08. 2024

어디서 낳아야 하죠

우리는 정말 그들과 다를까


임신 중기가 되자 그동안 미뤄왔던 고민이 슬금슬금 결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아기를 어디에서 낳을 거냐’였다. 3년 전 아이를 갖기 위해 처음 노력했을 때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이 독일의 출산 문화였다. 찾아본 결과 독일에는 조리원 문화가 없었다. 아니 조리원 문화는 사실 한국과 최근 한국의 영향을 받아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에 종종 존재할 뿐, 외국 어느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였다. 독일 출산문화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했다. 자연분만의 경우 2-3일, 제왕절개를 한 경우에도 5-6일 후면 퇴원을 한다. 종종 경산모의 경우에는 퇴원을 서두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병원보다는 집에서 편하게 회복하고 싶다며 말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산후조리원에서 주는 삼시세끼 밥도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도우미 아주머니도 없었다. 대신 독일에는 <Hebamme>라고 하는 산파 혹은 조산사의 역할이 지대했다. 독일에서 임신 소식을 알리면 가장 먼저 묻는 것은 ’너 그래서 조산사는 구했어?'이다.  아기를 낳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조산사가 하루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씩 집으로 찾아와 아기 산모의 상태를 봐준다.


이 정도만 해도 K-조리원의 나라에서 온 산모들에게는 스파르타식 그 자체이지만 더 경악스러운 것은 독일에서 출산을 한 엄마들이 올린 블로그에서 본 병원식이었다. 이곳 여자들은 출산을 한 후에도 김이 폴폴 나는 미역국 대신 블랙커피를, 포슬포슬 갓 지은 하얀 밥 대신 딱딱한 빵 한 덩어리를 먹는 것이었다. 그러자 음모론이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동서양 여자 체질 다름설>이었다. 이름은 내가 붙였지만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인듯, 내가 독일에서 출산을 할 예정이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알리면 돌아오는 대답은 열에 아홉 ‘근데 서양여자들은 우리랑 체질이 다르다는데.’였다. 자고로 서양인들은 우리와 체질이 달라 출산 후 빵과 커피를 먹고도 끄덕 없는 것이며 출산 후 일주일 후에도 아기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가는 등 동양인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도 서양여자들은 산후풍도 없고 골반도 넓어서 아기를 아주 숨풍! 낳는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십여 년을 살아보니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독일에는 독일사람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데다 개중에는 체격이 아주 큰 여자도 또 나보다 훨씬 작은 여자들도 있었다. 과연 이들을 다 ‘서양여자’라는 카테고리에 집어넣고 ‘우리 동양여자들’과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한국 여성의 운동부족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운동장과 동네 놀이터를 누비며 다녔던 왈가닥이었던 나도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도 운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기껏해야 체육시간에 햇볕을 쬐는 것과 등하교 시간과 학원으로 걷는 것을 제외하곤 별다른 신체활동도 없었다. 이곳에선 주말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호숫가로 수영을 가거나 가족들과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많다. 아직 해가 중천일 때 하교해서 마음껏 자유시간을 누리는 이곳 아이들에겐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라며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엉덩이를 들썩들썩거리던 학생들을 향해 엄포를 놓던 주임선생님도 없다. 청년기에 들어서면서는 운동 대신 다이어트가 화두가 되었다. 더 날씬하고 더 여리여리해 보이는 몸을 갖기 위해 아직은 앳된 여대생은 운동보단 덜 먹기에 집중하곤 했다. 그러다 임신을 하면 ’ 절대 안정‘이라며 주변에서 호들갑을 떠니 임신과 출산을 지나는 동안 몸이 과연 성할 수 있을까? 서양여자들은 우리와 체질이 다르고 그녀들의 골반이 더 넓어서라기보단 혹은 여성들이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는 아닐까?




독일에 산후조리원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 여자들이 산후조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산후조리는 독일어로 <Wochenbett>라고 하는데, 출산을 한 산모들이 삼 주간 절대안정을 취하도록 권장된다. 이 산후조리 기간에는 “Eine Woche im Bett, eine Woche am Bett und eine Woche ums Bett.” (일주일은 침대에서, 일주일은 침대 옆에서, 일주일은 침대 주위에서) 있기를 추천하며 아기보다 무거운 것은 절대 들지 말라고 권한다. 그리고 산후조리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산후 회복 프로그램(Rückbildungskurs)으로 이 8주간의 과정은 모두 보험으로 보장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산모들은 출산 후 몸 안의 장기들과 배 주위의 근육의 회복을 돕는 운동들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한국과 또 다른 한 가지는 출산 후 보름이 지나면 슬슬 집 주위를 아이와 산책하도록 산파가 조언해 준다는 것이다. 산모들은 가볍게 움직이며 몸의 회복을 돕고 아이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세상을 천천히 알아가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나 또한 출산 후 열흘 정도가 지나자 슬슬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겨울에 태어난 아기는 초보 엄마 아빠의 과도한 걱정으로 마치 눈사람처럼 꽁꽁 싸매여졌지만 작디 작은 아기를 아기띠에 넣고 둘이 노심초사하며 걸었던 소중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출산 후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자연분만을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사실 독일에선 산모의 선택에 따른 제왕절개를 할 수 없다. 응급상황이나 산모와 아기의 건강 때문에 의학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제왕절개는 산모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처음 이사실을 알았을 때 한국에선 많은 산모들이 자신이 원해서 제왕절개를 할 수 있다는데 나는 선택지조차 없다는 것에 무언가 박탈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연분만은 고통이 선불이고 제왕절개는 고통이 후불이라는데 나는 선불 후불 고민도 못하고 그냥 일시불로 결제를 해야 한다니.


그러나 산모가 출산의 주체가 되어 출산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일 수도 혹은 단점일 수도 있다. 거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처럼 태초부터 인류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출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동굴에서 살며 열매를 따먹던 시절에서 현대의학이 발전한 지금까지 출산은 늘 산모와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하고도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제왕절개술의 도입으로 수많은 산모와 아이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굉장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피부와 살과 지방과 근육 그리고 자궁을 절개해 아이를 꺼내는 제왕절개가 단연코 산모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다. 많은 합병증과 출혈을 동반하는 제왕절개의 위험성을 산모에게 충분히 고지하지 않은 채 제왕절개를 권하는 의사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경우엔 임신 사실과 함께 자궁에 5cm의 근종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호르몬의 영향으로 근종 또한 조금씩 자라기 시작 임신 말기까지 초음파로 아기를 보지 않는 날에도 근종은 세세히 살펴보며 추적해 왔다. 근종이 너무 커지거나 자궁을 압박하게 되면 제왕절개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출산 이 주 전 처음 출산병원을 방문했을 때에도 내 손엔 산부인과에서 써 준 소견서가 들려있었다. 출산병원의 나이 지긋한 의사는 근종을 두 명의 다른 의사들과 자세히 살펴본 후 자연분만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모와 아이를 잘 검진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출산까지 돕는 것이 산후조리의 첫걸음은 아닐까.




     “아니 외국에 살아도 한국에 와서 아기 낳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수화기 너머 엄마의 언성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 또한 엄마를 따라 언성을 높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어어? 엄마 또 점점 소리 지르네? 지금 뱃속에서 애기가 다 듣고 있는 거 몰라?”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다시 한번 이어지는 엄마의 성난 목소리. 저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엄마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영상통화가 아니어도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갔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과 출산과정을 같이 할 수 없는 건 좀 그래.”

     “아유 참나! 그거 잠깐 떨어져 있는 게 어때서? 아무렴 너만 고생이야!”


엄마는 오빠를 낳았을 무렵 아빠의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바람에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게 한이 맺혔던 모양이다. 동양여자들은 서양과 다르다는 것을 차치하고도 요즘엔 다들 간다는 산후조리원, 왜 보내준다는데도 마다하는지 안타깝고도 답답했을 엄마 심정도 이해가 간다.


더군다 아무리 일러도 출산 후 삼 개월은 지나야 비행기를 탈 수 있을 텐데 홀로 백일이 된 아기를 데리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앞으로 독일에서 둘이 아이를 키우려면 남편과 정말 한 팀으로 힘을 합쳐나가야 할 텐데, 갑자기 삼 개월 된 아이를 마주한 남편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가장 걸렸던 것은 출산의 순간을 남편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사랑해서 세 사람이 되는 순간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랐다.


결국 엄마는 나의 고집에 져주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 걸 엄마는 알았을 테다.

     “그래 니 맘대로 해.”

적당히 날 선 말로 마무리하는 엄마의 목소리엔 걱정이 한가득이지만 나는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도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기는 독일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남편은 분만실에서 9시간 동안 모든 출산과정을 함께해 주었다. 남편이 탯줄을 자르고 아이를 품에 안은채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몇 달 전 내린 결정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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