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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Apr 19. 2021

V - Verdauung (소화)

제 손으로 판 논문의 덫

EP. 22

V - Verdauung (소화)



 방학이  끝나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 나는 말없이 새로 이사  집의 부엌에 앉아 이메일의 쓰기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받는 이는 K 교수였다. K 교수는 대학원 첫날 강의실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나에게 길을 알려준 사람이자, 도저히 ' 학생' 우리 대학원의 신입생이라는 것을 믿지 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사람이기도 하다.


"제인, 도대체  시간째 그러고 있는 거야? 이메일은 어제  쓴 거 아니었어?"

"으아-! 나도 알아. 근데 교수가 나의 논문 지도를 거절하면 어떡해?  K 교수 수업을 수강한 적도 없단 말이야."


그렇다. 한창 주눅이 들어있던  학기부터 지금까지 나는 최대한 K 교수와 마주치지 않게 도망을 다녔던 터였다. 그의 수업은 필수과목이 아니었기에 도망치기는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돌아 돌아 결국 K 교수의 지도하에 논문을 쓰고자 하니, 이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가 거절하면 다른 교수를 빨리 찾아봐야지! 그리고 교수의 수업을 들은 사람만 논문 지도를 받을  있다는 법은 없어."


남편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의 충고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작성한 메일을 다시 노려봤다. 맞춤법은 맞는지, 어색한 문장은 없는지 신경 써야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메일 속의 문장은 이미 완벽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뭐랄까, 정신력의 문제였다. 피하고 싶었던 장애물과 정면으로 마주하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아아! 나 보내기를 누르고야 말았어. 이제 어떡하지?"

"잘했어. 이제 이메일은 너의 손을 떠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는 웃으며 놀리듯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그 나름의 칭찬이자 위로인 것을 알고 있었다.





 K 교수의 답장은 예상보다는 빨리 왔지만,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그의 메일이 대단히 짧았다는 것이다. 그의 문장에는 맞춤법이 틀린 곳은 없었지만 생략된 단어가 많았다. 짧은 이메일의 결론은 '다음 주에 교수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이미 이메일에 논문 계획서를 첨부해 보냈지만, 그는 그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짧은 이메일을 반복해서 읽었다. 일주일 후의 이 만남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이 들자, 잔잔한 수면에 큰 돌멩이가 툭 떨어진 듯 초조함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내가 준비한 논문 계획서는 A4 종이   반을 조금 넘긴 분량이었다.  삼천 자가  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계획서를 채워 넣기 위해 나는 꼬박  개월을 매달렸다. 그동안 나는 논문 주제를 찾기 위해 인터넷, 신문, 거리의 광고 그리고 사람들을 관찰했고, 주제를 잡았다가 놓쳐버리고  잡았다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논문 주제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한 후에도 이것이 과연 3개월 안에 60장의 분량을 채울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지난  학기 동안 나의 독일어는 어학원을 졸업할 때보다는 눈에 띄게 늘어있었지만, 논문이라는 과학적 연구 방법과 학문적 글쓰기가 합쳐진 문서를 작성하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학사 졸업을  뒤였지만, 디자인과를 나온 나는 졸업논문 대신 졸업 전시를 해야 했다. 모국어로도 써본 적이 없는 논문을 독일어로 작성해야 한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이것 또한 발표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돼. 게다가 이번에 관객은 교수 한 명뿐이잖아.'


순간 대학원에서의 처음 했던 발표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당시에는 정말 모든 것을 뒤로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열심히 준비해 결국 무사히 끝낼  있던  발표의 기억은  뒤로 나에게  자양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교수를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K 교수의 사무실은 학교 도서관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아직 개강하지 않은 터라 캠퍼스와 도서관은 조용했다. 완연한 여름을 알리는 푸른 이파리들만이 바람에 따라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사람 없는 학교의 고요함을 부각시켰다. 도서관은 열려있었으나 역시 인적 없이 조용했고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도서관 사서만이 건물이 열려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난 3학기 동안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건물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레몬 먹은 사람처럼 자꾸만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적막이 흐르는 도서관을 지나 교수실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띵-동"


교수실이 있는 2층은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벨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K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유리문을 통해 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주었다. 독일 특유의 신경을 거스르는 둔탁한 기계음이 울리며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K교수는 어딘가 분주해 보였다. 짧게 인사 후 그는 등을 돌리며 내뱉듯 말을 했다.


"저쪽으로 들어가서 앉아있어요."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문이 반쯤 린 그의 교수실이 있었다.  


    



 교수실 안에는 물건들이 소란스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고개를 앞으로 반쯤 숙인   있었고,  책상에는 학생들의 논문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들이 빚쟁이처럼 그의 검토를 기다리며 쌓여있었다.  앞에는 방문객을 해 놓인듯한 책상을 검은색 플라스틱 상판의 철제의자들이 둘러쌓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검은 의자 하나를 책상의 곁에서 떼어냈다. 아무런 소음도 만들지 않고, 어떤 물건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의자에 앉아 가져온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준비해온 논문 계획서 파일을 열려는 찰나 K 교수가 들어오며 물었다.


"어... 그래요. 근데 잠깐, 학생 혹시 내 수업 들은 적 있나요?"

"아, 아니요. 아쉽게도 교수님 수업을 직접 들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 K 교수는 나의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역시. 수업을 들었다면 내가 기억을 했을 거예요. 그럼 왜 나에게 논문 지도를 받고 싶은 거죠?"


그의 질문을 듣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물론 예상했었어야 할 질문이었지만, 논문 계획서의 내용에만 집중하느라 답변을 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수와의 면담은 발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면접에 가까웠다.  


"아... 그게..."


손에 땀이 주룩 났다. 눈에 띄지 않게 바지에 손을 비벼 땀을 닦았다.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다면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교수실에는 K 교수와 나 단둘뿐이었다.


"저의 논문 주제는 박람회(Messe)와 관련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박람회야말로 마케팅과 세일즈가 동시에 일어나는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K 교수의 전공과 주된 강의 주제가 바로 마케팅과 세일즈였다. 그는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조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사실 이메일을 받았을 때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럼 논문 주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래요?"


그는 그제야 바쁘게 강의실을 배회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쪽으로 다가와 의자를 꺼내서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그는 눈빛은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매서운 편이었다. 나는 긴장해 여전히 손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얼굴이 어딘가 독수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의 멋있는 모습을 동경하는 사람도 울타리를 사이에 두지 않고 독수리와 마주 앉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에서 외워온 논문 계획서 내용을 읊으려 입을 열고 운을 떼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발표하듯 일방적으로 말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잠에서   조금   꿈의 내용을 기억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두서없이 핵심 내용만을 나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집중하느라 독일어 발음뭉개진  겨우 입 밖으로 새어 나왔고, 긴장한 머리는 독일어 문법마저도 완전히 박살  버렸다.


숨을 몰아쉬듯 마지막 문장을 뱉어내는 나를 보는 교수의 표정은 당연히 전보다 확연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나에게 직설적으로 말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전혀 감이 안 와요. 맞아요.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지금까지 그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나의 두서없는 지껄임이 그의 희미한 기억을 상기시켰는지도 모른다. 그가 대학원 첫날 나에게 보였던 그 표정을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몸을 들썩거렸다.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깊은 패배감이 들었다. 지난 삼 학기 동안 애썼던 모든 순간이 헛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급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제가 독일어가 아직 서툴러서 혹시나 제 말을 교수님이 이해하지 못하실까 봐 글로 써왔습니다. 제가 말보다는 글을 잘 쓰거든요."


K 교수의 들썩거리는 엉덩이가 멈췄다. 논문 계획서 파일을 열어 노트북을 교수 쪽으로 밀어주었다. 분명 메일에 첨부했지만, 그는 처음 보는 눈치였다. 잠시 교수실에는 정적이 흘렀고, 그는 문서를 다 읽자 다시 팔짱을 꼈다.


"이거, 본인이 직접 작성한 건가요?"

"네. 맞습니다."

"잘 썼네요. 이해했어요. 이제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연구 방법은 무엇으로 할지 생각해봤나요?"


그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자 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게... 전문가 인터뷰입니다!"

"오 그래요? 전문가 인터뷰라... 아주 좋아요. 근데 전문가를 섭외하고 인터뷰를 직접 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자신도 없었다. 내가 한 말을 다시 주워 담고만 싶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그의 표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생각과 전혀 다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네 물론이죠. 이미 몇 명 생각해 놓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메일로 리스트와 논문의 목차를 작성해서 보내주세요. 음, 논문 신청서는 인쇄해 왔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제목은 좀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나의 논문 제목을 고쳐주었다. 내가 지난 삼 개월간 고민했던 논문 제목은 그렇게 그의 손에 순식간에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교수는 교수였다. 그는 빠른 시간 안에 나의 주제와 연구 방법이 잘 드러나는 논문 제목을 뽑아내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사무실에 벨이 울렸다.


"자,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되겠네요. 학생들이 논문 지도를 부탁할 때 가장 걱정하는 것은, 교수가 승낙을 해줄까 라더군요. 제인 양의 논문 지도를 맡겠어요."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논문 신청서에 빠르게 사인을 했다. K 교수의 서명이 된 신청서를 들고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도서관 앞에 박제된 듯 서 있었다. 분명 원하던 일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잘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마치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었지만, 입맛에 맞지 않아 그저 더부룩한 속만을 얻게 된 것 같았다. 얼른 집에 가서 된장찌개를 끓여 먹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논문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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