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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May 03. 2021

X - X

마침내 다가온 논문 발표일

EP.24

X - X



"그럼  다녀올게."

"잠깐만, 나 한번 안아주고 가."


 남편과의 포옹은 연인보다는 동료와의 것에 가까웠다. 남편은 지난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논문의 오탈자 검사를 해주었다. 저녁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틈도 없이 바로  번째 업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마지막 나흘 동안에는 나와 남편 모두 철야를 해야 했다. 심사를 위해 정해진 논문의 최소 분량은 60페이지였지만, 나의 논문은 그의  배에 달하는 110페이지였다.  달에 걸쳐 작성한 나도 힘들었지만, 며칠 안에 모두 검토해야 하는 남편은 오죽했을까. 마침내 완성된 논문을 인쇄하러 가는 나를 배웅해주는 남편의 안색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인쇄소에서 금방  거랬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붙이고 있어."

 

남편을 침대에 뉘이고 집을 나선 시각은 아침 9시였다. 며칠  미리 알아놓은 인쇄소에 들러서 제본을 하고 학교에 가서 논문 제출을 하는 것이 오늘의 미션이었다. 평소 하루라도 샤워를 하지 않으면  견디는 성격의 나지만, 이미  기록은 사흘을 넘기고 있었다. 씻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도시의 분위기는 나의 행색을 더욱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학교에 논문만 제출하고 집에 오면 깨끗이 샤워도 하고 한국 음식도 배달시켜 먹고 한숨   있을 거야!'


하지만 인쇄소는 생각보다  곳에 있었다. 심지어 구글 도를 따라 도착한 인쇄소 어느 아파트에 있었. 아마도 '야매' 운영하는 인쇄소인 듯 보였. 초인종을 누르니 한 목소리가 암호를 말하듯 ‘인쇄?’하며 짧게 물었고 나 또한 긴장한 채로 맞다고 속삭였다. 운동복 차림의 주인은 아파트 지하의 창고로 데려갔다. 수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나의 신경은 온통 논문 제본에 쏠려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주인이 마피아 보스던, 깡패던 나의 논문만 제대로 인쇄해 준다면 무슨 상관이냐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아파트 창고 구석에 앉아 제본이 끝나기를 다렸는데 이십  정도가 지나자  인쇄기에서  나온 논문  권과 영수증을 들고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영수증에는 120유로가 적혀있었다. 예상보다 많이 나온 금액에 움찔하자 그는 카드 결제도 된다며 웃어 보였다. 논문을 제출해도 음식 배달은 조금 힘들겠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카드기가 ''하며 나의 계좌에서 그의 계좌로 돈을 전송하자,  제본된 논문을 건네주었다. 논문은  구운 빵처럼 따듯했다.


다시 구글 지도를 켰다. 목적지는 학교였지만,  때와 달리 버스 대신 도보를 택했다.  유로가 넘는 거금을 결제하고 나니 삼유로, 한국돈으로 사천  정도의 버스비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편에게 약속한 금방 다녀올 것이란 말은 원치 않았지만 거짓말이 돼버렸다.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생각이라기보다는 망상에 가까웠다.  내용은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논문이 망가지거나, 누군가 내가 품에 소중히 안은 논문을 돈으로 착각하고 강도질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누군가 착각한  논문이 담긴 종이 상자 훔친다 해도, 이내 실망해선 도로 버릴 종이 뭉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난  달간 스스로를 갈아 넣어 만든 보물이었다. 그렇게 수시로 주위를 살피며 첩보 작전하듯 학교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 후로 사십 분을 걸어서 나는 이 첩보 작전의 최종 목적지에 겨우 다다를 수 있었다.  



 

 삼 개월 전 논문 신청서를 접수한 , 나는 집에 있는 연간 달력 위에 논문 마감일을 빨간색으로 체크해 두었다. 그리고 지난  달간 이날에 맞추어 삶을 살았다. 어떤 날엔 기쁜 마음으로,  다른 날엔 우울한 기분으로 X표를 쳐가다 보니 어느새 빨간 동그라미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상 D-day 펼쳐진 풍경은 예상과 달리 너무나 평범해서 논문을 제출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설레고 흥분한 마음으로 논문을 제출하는 나와는 달리, 담당 직원에게는 이맘때쯤이면  찾아오는 귀찮은  중에 하나로 보였다. 그녀는 나의 이름을 명단에서 확인한  논문을 받아 들고는 건조한 말투로 담당 교수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다. 이게 전부인 건가 싶어 잠시 멍하게  있는 나를 그녀는 오히려 의심쩍은  흘깃거렸다. 냉랭한 분위기에 정신을 차린 나는 사무실의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와 다시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한가롭게 멍을 때리거나, 논문 제출을 축하할 시간은 없었다. 이주 후에 논문 발표일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논문 발표는 논문의 내용을 구두로 담당 교수와 부교수 앞에서 정리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교수를 제외하고도 논문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참여가 가능하다. 제출한 논문과 구두 발표의 점수가 합쳐져 나의 논문 최종 점수와 합격·불합격 여부가 가려. 사실 논문 발표는 논문 신청서를 제출할 때부터 나에게  숙제였다.  이유로 나보다  학기 일찍 논문을 쓰게  대학원 동기들의 논문 발표도   다녀왔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강의실에 들어가 남의 논문 발표를 듣는 것은 실례이다. 남편의 말로는 발표 전에 '너의 주제에 관심이 있어서 발표를 듣고 싶은데 괜찮겠니?' 하고 예의상 물은 , 발표 후에 ' 봤어!' 혹은 '  잘했어!' 등의 칭찬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피곤하다 싶겠지만, 이것이 독일인들의 예의라 하니 불만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맞는 이야기이다.


나는  차례 논문 발표를 참관했는데 뜻밖에도 그들  누구도 발표 자료에 공을 들인 사람은 없었다. 그저 하얀 바탕에 쓰인 중요한 텍스트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조리 있게 자신의 논문에 대해서 발표할  알았고, 발표  교수들이 묻는 말에도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학생들과 처지가 다르다. 그러나 누구도 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년간 뼈저리게 느낀 터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것이고, 답답한 놈이 송사한다고들 하지 않나. 그로 인해   동안 다시 지옥이 시작되었다.  일주일은 온전히 발표자료를 만드는 데만 공을 들였다. 나는 교수들이 나의 완벽하지 않은 독일어에 한눈을 팔거나, 집중력이 흐려지지 않게 나의 원맨쇼(One-man-show)의 구성을 탄탄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남은 일주일은 발표에만 집중했다. 첫 학기의 발표를 상기시키며, 스크립트를 만들고 그 내용을 달달 외웠다. 그때보다는 독일어 실력이 월등히 늘었지만, 혹시나 긴장해서 문장이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고 싶었다. 내용을 외우고 나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실전 연습을 했다. 남편이 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 집 고양이가 관객이었다. 해가 지면 고양이는 산책하러 자리를 떴고, 다시 남편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연습이 지겨워질 때면 한국의 어떤 아이돌 그룹을 생각했다. 그들은 자다가도 깨우면 데뷔곡을 부를 정도로 연습을 해야 했다고 들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것은 무언인가. 나의 관객이 확연히 적다는 것을 빼고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 않은가? 아침에 눈을 뜨면 잘 잤냐는 말 대신 "Gutern Tag. meine Damen und Herren...(안녕하세요. 신사 숙녀 여러분..)"이라는 인사를 남편에게 건넸다. 남편은 지겹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지만, 이내 나의 끝없는 노력에 경탄했다.




 마침내 돌아온 논문 발표일, 나는 정해진 시간보다  시간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연습하고 싶기도 했지만,  미친 듯이 떨리는 가슴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는지 몰라서이기도 했다. 도서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동안 발표 연습을 했다. 사실 연습이라기보다는 계속 내가   발표를 망치면  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되새김을 하는 시간이었다. 시계를 보니 발표시간이 삼십  전으로 다가왔다. 화장실에 들러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표가 예정된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올라갔다. K 교수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굳게 닫힌 강의실에는 다른 이의 논문 발표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새까만 머리의 갈색 눈동자를 갖은 여학생이 강의실 문에 귀를 쫑긋 세우며  있었다. 조심스레 인기척을 내니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태국에서  교환학생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다음으로 순서가 정해져 있었는데, 나와 같은 사정으로 일찍 와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 둘은 초면이었지만 대화가  통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논문 작성과 발표 모두를 영어로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강의실 안에서 발표를 하는 사람도 그녀의 친구인데, 그도 영어로 발표를 한다고 했다. 살짝 귀를 기울여 보니 얼핏 영어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나에게 독일어로 논문을 작성하고 발표하느냐 물었다. 나는 교환학생이 아니라 정식으로 입학했기에 독일어로 모든 교과과정을 수료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나의 대답을 듣자 안쓰러움과 위로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독일어, 정말 끔찍해”,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유일하게 건넨 독일어였다. 그렇게 그녀와 논문과 K 교수에 대해 한참 떠들다 보니 어느새  차례가 돌아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발표를 마친 그녀의 친구가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그의 표정은 마치 방금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나와 같이 갈색 눈동자를 갖은 두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논문 발표에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논문의 내용은  자신이 가장  알았고, 발표 내용 또한 끝없이 연습한 후였다. 나는 연습한 것에서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발표를 마칠  있었다. 교수들의 매서운 질의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을 했다. 모두가 예상했던 질문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K 교수는 면담  논문 주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던 나를 기억하는   놀란 얼굴이었다. 발표와 질의가 모두 끝나자 교수들은 잠시 나가서 결과를 기다릴 것을 청했다. 복도에 나가니 그제야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거울을 볼 수 있었다면 나 역시 발표 전 본 그의 표정과 똑 닮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나니, 이제 결과야 어찌 됐든 상관이 없었다. 창밖은 내다보니 건너편의 도서관이 보였다.   도서관 이층에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혼자 망부석처럼 앉아있었다. 그녀가 뒤를 돌려는 찰나 K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 양, 들어오세요."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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