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뭐가 억울한 게 많은 눈치라며 엄마가 들어줘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엄마~ 으아앙!" 따님은 나를 보고 달려 나와 안기며 더 크게 울어재끼기 시작했다.
다음 주 수요일 따님 학교에서 바자회가 있다. 각자 집에서 물품을 가져오고 품목에 따라 분류한 뒤, 조를 나누어 맡게 된 물건들을 열심히 판매한다.(따님은 집에서 갖고 놀지 않는 새것 같은 인형 6개를 이틀에 걸쳐 들고 갔다.) 따님이 속한 조는 총 7명, 문구류와 서적을 담당한단다. 내 물건을 내가 파는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각 조끼리 자신들의 가게가 돋보이게끔 간판을 만든다.
우선 가게 이름부터 정하기 위해 서로 의견을 냈다고 했다. 따님도하나를 냈는데 친구들이 별로라고 선정되지 못해 속상했단다. 그래도 정해진 것이니 수긍하고 열심히 간판 만들기를 하는데 자꾸만 자신의 의견이 묵살당하고 그리고 싶은 그림은 못 그리고 스티커 붙이기만 하게 돼 서운했다고 했다. 급기야 같이 스티커 붙이기로 한 친구마저 자기한테 다 떠넘기곤 그림을 그리러 가버려 불같이 화가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힘들었단다.
화가 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일단 토닥토닥 안아주고 달랬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다. 따님은 혹시 엄마가 내가 원하는 걸 컴퓨터로 뽑아 줄 수 있냐고, 그러면 간판을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당연히 해줄 수 있다고, 원하는 바를 말해보라 하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친구들과 정한 가게 이름이 오리마켓인가 보다. 글자체도 직접 고르고, 색은 주황색, 오의 ㅇ안에 오리그림이 들어가야 한다고 디테일하게 주문한다. 대충 해치울 요량이었는데 생각보다 구체적인 요구사항에 살짝 당황했다.
뽑아준 오리마켓 종이를 들고 가더니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색칠했다. 평소에 주로 거실에서 굴러다니며 숙제를 하는데 자기 방 책상에 앉아 내가 오히려 놀랐다. 뭐 해??라고 묻는 나에게 간판 만들어!!라고 단호히 외치셨다.
따님의 오리마켓은 대충 이런 식으로 완성됐다. 10시가 넘도록 잠도 안 자고 초집중모드로 만들었다. 어찌나 열심히 하던지 거실구석에서 조용히 쭈구리처럼 따님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기세등등하게 가지고 나와서 이제는 잘 수 있겠다 싶어 얼른 정리하려 하니 따님이 또 내 손을 다급히 잡는다.
친구들에겐 '내가 만든 간판 마음에 들어?"라고 묻는 쪽지를 썼다. 선생님께도 여쭤야 한다며 저런 쪽지를 썼다고 보여준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동의를 받고 허락을 구하겠다는 건 좋은 생각 같아 일단 가져가보라고 말했다.
사실 정말 걱정되는 건 친구들이 따님의 간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어서, 여러 가지 경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엄마 눈에는 따님이 만든 간판이 최고야,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다 다르기 때문에 오늘 만든 간판을 친구들이 싫어할 수도 있어, 그런데 따님이 친구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은 정말 멋진 거야,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 없다, 그렇지?" 따님은 간판을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행위 자체에서 위로를 얻었는지 의외로 쿨했다. "친구들이 싫어하면 끝이지, 괜찮아. "라고 말했다. (그래놓고 자기 전 하나님께 자기 간판이 친구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애는 애다.)
다음날, 선생님께선 그래도 좋다고 하셨지만 친구들은 두 개나 붙이면 너덜너덜하다고 반대해 결국 다시 가져왔다. 크게 속상하진 않고 중간 정도 속상하다고 괜찮다고 했다. 너덜너덜할 것 같긴 하다며 이해하기도 했다. 바라보는 나는 그렇게 또 자라는 모습이 기특했다.
팬데믹 이후 학교에선 갈등 상황을 회피하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예전엔 친구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반복해 겪었다면, 요새는 '나는 친구가 필요 없어'라며 나 홀로 벽을 점점 높이거나 '저 친구랑은 말이 안 통해 손절이야'라고 그냥 모른척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는 갈등 상황이 사라지더라도 그 이후에 남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오지 않는 아이들도 많다.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며 불편해지는 걸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팬데믹동안 혼자 아무 갈등 없이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전까진 보지 못한 해결방식이다.
그래서 따님의 오리마켓 소동을 더 응원했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과 수도 없이 부딪히며 사는 게 인생인데 지혜롭게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한다 생각했다. 이번에 이렇게 해봤으니 다음엔 다르게도 해보고, 그렇게 자꾸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며 사회생활의 쓴맛과 인간관계의 단맛을 알아가면 좋겠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지만, 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잖나. 따님의 용기와 실천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