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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지에 구멍 뚫은 날

by 고야씨

손가락으로 창호지를 뚫어본 적이 있다.

어릴 적 TV에서 본 사극 때문이었다.

드라마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꼬마 신랑과 아가씨 신부가 혼례를 올리던 장면.


첫날밤, 촛불이 꺼지자

마을 사람들이 살금살금 문 앞으로 다가온다.

검지손가락에 침을 발라 살살 구멍을 뚫는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방 안을 들여다본다.

꼬마 신랑이 울음을 터트려

아가씨 신부가 말을 태워주는 중이다.

훔쳐보던 사람들이 킥킥대자

신부가 문쪽을 본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도망친다.


그 장면이 나를 끌어당겼다.


문에 구멍을 낸다는 건 해선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뚫은 자리에 종이를 덧붙이면 괜찮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장을 보러 간 날,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문에 구멍을 내자.

딱 하나씩만. 두 개는 안 돼.

만약 혼나면 네가 했다고 말해줄 수 있어?"


나는 누나라 많이 혼났고,

동생은 동생이라 슬쩍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우리 둘 다 그걸 알고 있었다.

동생은 좋다며 씩 웃었고, 대신 자기는 두 개를 뚫겠다고 했다.


우리는 검지에 침을 발랐다.

동생은 신이 나서 볼이 동그래졌다.

아마 내 얼굴도 그랬을 것 같다.


창호지를 꾹 눌렀다.

생각보다 질겼다.

포슬포슬한 종이는 살짝 늘어날 뿐,

구멍은 쉽게 나지 않았다.

침이 더 필요했다.

손가락에 바른 침이 금세 식었다.

우리는 몇 번이고 꾹 눌렀다.

빙글빙글 문질렀다.

창호지는 실처럼 풀리듯 얇아지더니

“툭”— 손끝에 바람이 닿았다.

바깥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각자의 구멍에 눈을 댔다.

풀썩 누워 자는 강아지,

엎질러진 물그릇,

장대에 걸린 빨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햇빛이 틈을 타 순간순간 안으로 쏟아졌다.

조그만 구멍으로 보는 바깥은 느리고 신비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구멍에서 밀려드는 건 이제 걱정이었다.

공책을 찢어 풀로 붙였는데 너무 티가 났다.

다시 떼고, 두루마리 휴지를 붙였다.

그나마 조금 나았다.

하지만 엄마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문에 구멍을 뚫으면 안 되는 거라고, 다음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생각보다 싱겁게 지나가서 동생에게 한 부탁이 머쓱했다.


다음 날, 구멍 위로 네모난 한지가 덧대어져 있었다.

며칠쯤 더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밖이 보인다는 건 안도 보인다는 뜻이니까 막는 게 맞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볕이 잘 드는 아침, 아빠가 말했다.

“오늘은 문에 마음껏 구멍을 뚫어도 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빠는 창호지를 새로 바를 거라고 했다.

동생과 나는 신이 나서 이쪽저쪽 마구 구멍을 뚫었다.

웃음이 터졌다.

양손 검지로, 그러다 열 손가락으로.

그러다 창호지를 북북 찢었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나무 살만 남은 문.

바깥도 방 같고, 방도 바깥 같았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풀을 쑤었다.

나무주걱이 바닥을 긁는 소리,

들척지근한 밀가루 냄새,

집 안이 부풀어 오르는 냄새,

곧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냄새.


아빠는 문짝을 떼어

뒷마당 네모난 돌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는 남은 창호지를 말끔하게 뜯어냈다.

엄마와 아빠가 새 종이를 재단했고,

동생은 나무살에 풀을 바르는 걸 도왔다.

나는 꽃을 따러 갔다.

“제일 예쁜 걸로 다섯 개만.”

엄마가 말했다.

나는 작고 예쁜 꽃과 잎을 일곱 개 가져왔다.

엄마는 다섯 개보다 일곱 개가 더 예쁘네 하고 웃었다.


풀을 바른 창호지 위에 꽃잎을 조심스레 올리고

그 위에 다시 새 창호지를 덮었다.

문 하나를 갈았을 뿐인데 방 안이 환해졌다.


아침이면 앞문 창호지를 통과한 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따온 꽃잎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해가 기울면 뒷문 창호지에 노을물이 든다.

꽃잎은 노을과 노을 사이에서 먼저 밤을 맞았다.

다시는 문에 구멍을 내지 않을 거야, 생각했다.


지금도 검지 손가락에는 그 느낌이 남아 있다.

얇은 종이를 뚫고 바람이 닿던 순간.

이미 사라진 우리 집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감각 같다.

그 시절을 가져오고 싶은 건지

나는 지금도 꽃잎과 나뭇잎을 주워 말린다.

한지에 끼워 창문에 붙이거나,

필름지에 넣어 책갈피로 만든다.

기억은 공기처럼, 계절처럼

내 주변을 맴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볕이 좋은 날이면

우리 네 식구가 뒷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것만 같다.

풀을 쑤고, 종이를 바르고,

문이 환하게 빛나던 그 아침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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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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