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러그드 보이 현겸은 그네에 앉아,
“난... 슬플 땐 힙합을 춰.” 하고 말했다.
현겸은 그때 열일곱 살이었다.
열한 살의 나는 뒷마당 개집 앞에 앉아,
“난... 슬플 땐 리코더를 불어.” 하고 말할 것이다.
고야나무 아래에서.
서럽고 속상하고 화날 때면 강아지에게 갔다.
리코더를 잘 불게 되면서 리코더를 가지고 갔다.
재밌고 즐겁고 신날 때도 물론 그랬지만
기쁠 때와 슬플 때는 선곡이 달랐다.
기분이 좋을 때는 밝은 노래를 불었다.
내가 계이름을 아는 노래는 학교에서 배운 노래라,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미루나무 꼭대기에,
퐁당퐁당, 둥글게 둥글게 같은 곡들이었다.
속상할 때는 단조를 불었다.
개구리 왕눈이가 피리로 부는 그 노래였다.
학교에서 배운 건 아니고 친구가 계이름을 적어주었다.
(그 쪽지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왕눈이 노래를 불다가
그 멜로디가 구슬퍼서 울컥하면
’흐흑‘ 우는 호흡이 ’삐빅’ 연주됐다.
얼른 리코더에서 입을 떼고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민망해서 더 서러웠다.
강아지는 내 기분을 잘 알았다.
울상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어떨 땐 그러지 말라고 장난을 걸었는데,
“너까지 왜 그러는 거야, 왜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
서러움이 폭발해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럴 때 꼭 고야를 따러 엄마랑 동생이 왔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개집에 들어가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거기서 청승을 떨고 있어, 얼른 들어와, 수제비 끓여 먹게. “
수제비는 참 치사한 거였다.
입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면
눈물에 쓸려나간 마음이 다시 차오를 준비를 했다.
다 변한 것 같던 세상이 여전히 그대로,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고 있어서,
맘껏 치사할 수 있어서 내심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