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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29. 2021

해외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

"수끄... 이잉... 예엉..."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이들 사이에 끼어 내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괴상한 이름이 직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갑갑해진 직원이 다시 한번 힘겹게 소리 냈다.


"수끄... 이잉... 예엉..."


내가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만 해도 십 수 명으로 북적이던 대기실이,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한 명씩 진료실 쪽으로 사라지면서 곧 한산해졌다.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나를 포함해 4명 정도다. 


이번에도 아무도 안 나서나 했더니, 그제야 방금 불려진 이름이 내 것임을 깨달았다.


공식 서류에 올린 내 영문 이름은 Sook Jin Jeong이다. 


한글 이름을 단순히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뿐인데, 서양인들은 K로 끝나는 음절을 강하게 발음하면서, J로 시작하는 음절은 지읒이 아닌 이응에 가깝게 발음한다. 독일어 등 다른 유럽 언어가 J를 Y처럼 발음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헬로, 쑥"


인도식 억양이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왔다.


전화 건 사람은 누구고, 쑥은 또 누굴까 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이름을 '쑥'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다.


약국에서 근무하는 M의 전화다. 같은 학교 학부형이라 평소 눈인사 정도는 했지만 이름을 아는 사이는 아니다. 신용카드 전표를 보고 내 이름을 파악했으리라. 


약을 구매하면서 카드로 결제했는데, 다음날 인터넷으로 내역을 확인하니 동일한 금액이 두 번이나 결제되어 있었다. 간혹 발생하는 일이다. 그날 오후 아들을 데리러 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M에게 중복 결제된 사실을 알려줬다. 


나의 빠른 대처 덕택에 약국 손님의 카드를 두 번씩 찍어대던 카드단말기 오류를 일찌감치 찾아냈다고 M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글 이름을 영어로 표기할 때, Gil Dong Hong처럼 세 음절로 분리해두면 서양에서는 가운데 음절을 Middle Name로 여긴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에서 '길'과 '동'을 별개의 이름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영화배우 톰 행크스의 정식 이름은 '토마스 제프리 행크스 (Thomas Jeffrey Hanks)'이다. 제프리가 중간 이름인데,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는 그의 중간 이름을 모르거나 알아도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을 것이다. 약국 직원이 나를 '쑥'이라 부른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런 혼란을 막고 싶다면 영어 이름을 Gil Dong Hong 대신 Gildong Hong처럼 표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남편의 성(姓)이 어떻게 됩니까?"


직원이 난감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적어 놓은 거 보면 모르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남편의 성인 Lee가 적힌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알려줬다. 


남편의 도서관 카드를 내가 대신 신청해 줄 때다. 신청서에다 남편의 영문 이름과 성을 구분하여 입력했지만, 이 직원은 내가 위치를 혼동했다고 판단한 듯하다. 


서양식 이름에는 Lee라는 First Name이 많아서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Kim도 마찬가지 신세다.


Lee와 Kim이라는 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First Name으로 더 흔하다. 남녀 모두에 해당한다. 


리 에반스 (영국 코미디언)

리 맥 (영국 코미디언)

리 터게슨 (미국 영화배우)


리 그랜트 (미국 영화배우, 감독)

리 메리웨더 (미국 영화배우, 모델)

리 레믹 (미국 영화배우)

리 안 워맥 (미국 가수)


킴 셸스트룀 (스웨덴 축구선수)

킴 보드니아 (덴마크 영화배우, 감독)

킴 스탠리 로빈슨 (미국 작가)


킴 캐트럴 (영국 영화배우)

킴 캠벨 (전 캐나다 총리)

킴 베이싱어 (미국 영화배우)

킴 카다시안 (모델, 영화배우, 인스타그램 스타)



"지난번에 만난 친구도 김, 저 친구도 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영국인 남편의 하소연이다.


아내가 소개해주는 사람마다 죄다 김씨와 이씨라 이들을 구별해 내기 힘들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글래스고 김', '맨체스터 김''리버풀 리' 이렇게 구분 지었다고 한다. 어릴 적 보던 드라마에 등장하던 '쿠웨이트 박'이 생각났다. 



"헬로, 미스터 정"


직원의 첫인사말이다.


공항 외곽에 위치한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다. 여행 기간 동안 이곳에 차를 세워두면 셔틀버스로 공항을 오가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내 남편을 향해 직원이 미스터 정이라 부른 것이다. 


"나 미스터 정 아닌데요."


평소에도 말투가 무뚝뚝한 남편은 직원의 친절한 인사말을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주차 서비스를 예약하면서 내 이름 앞에다 '미세스'라고 표기했으니, 자동으로 내 남편을 미스터 정이라 판단했으리라. 업무 규정대로 고객을 대했을 뿐인데 퉁명스러운 남편의 태도에 직원이 얼마나 당황했겠나.


결혼 후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영국 문화와 성을 바꾸지 않는 한국 문화가 빚어낸 상황이다.



"아, 오늘 바로 그날이구만..."


매니저가 작은 서류 뭉치를 들고 슬며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며 말이다. 둘만의 은밀한 작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Lifen Liu는... Lucy Liu의 이름이고... 

Zhang Chan은... Jackie Chan의 이름이고...  

Mei Yeoh는... Michelle Yeoh의 이름이고... 

Yu-sen Woo는... John Woo의 이름이고..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다 큰 어른들끼리 귓속말로 대화를 이어갔다.


당시 우리 부서에는 한국, 스페인, 스웨덴, 독일, 대만, 중국, 러시아, 라트비아, 홍콩, 일본 출신이 근무했다. 업무 성격상 다양한 외국어 구사자가 필요해서다.


매니저가 날 찾은 이유는 직원들에게 월급명세서를 나눠줄 때 도움이 필요해서다. 직원이 입사할 때 제시하는 여권에 있는 이름이 월급명세서에 찍혀 나오는데, 이 이름과 평소 동료들이 부르는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중국과 대만, 홍콩 출신의 직원이 이런 예에 해당했다.


일상에서는 영어 이름을 쓰지만 공식 서류에는 본명인 중화권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들의 성마저 Wang과 Weng처럼 모음만 한두 개 바꾸면 그 이름이 그 이름처럼 보였다. 적어도 매니저에게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른다. 서양인들은 중화권 출신의 이름을 구별해 내기 힘들어하는 편이다.  


매니저 체면에 대놓고 Lifen Liu가 누구냐고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물어볼 수는 없고 하니, 동료들의 본명을 꿰차고 있던 나에게 은밀히 부탁한 셈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 중에도 영어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다. 


영어식 이름을 쓰면 편하다. 


내 이름을 Sookjin Jeong이라고 영어로 불러주면 10명 중 10명 모두가 철자를 물어본다. 

그 10명 중 9명은 다시 만났을 때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어 이름 대신 Susan Jeong이나 Sarah Jeong처럼 영어 이름을 쓴다면, 적어도 First Name 정도는 기억해 줄 것이고 철자를 일일이 불러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영어식 이름의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내 고유한 이름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에서 나는 지금껏 본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편하지만 흔한 이름으로 살면 내 가치가 저하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고, 앞서 언급한 중화권 출신 동료의 경험처럼, 서류와 일치하지 않는 이름으로 인한 혼란이 싫은 것도 사실이다.


해외에 사는 한인이라면 누구나 갈등할 수밖에 없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rina Krasnikova on Pex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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