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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06. 2021

결혼반지 분실 사건

"어, 못 보던 반지네."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내가 한 말이다.


남편과 나는 결혼반지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 당시에는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 부끄럽지만 이 자리에서 솔직히 고백한다. 내가 남편의 반지를 잃어버렸다. 


내 실수를 뉘우치고 남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아있는 내 것마저 빼서 둘 다 공평하게 반지 없이 지내자,라고 내가 제안했다. 그래서 둘 다 안 끼고 다녔다. 


남편은 결혼반지 분실 사건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자기 반지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강해서, 이를 잃은 상실감과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반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화권에 사는 유부남 입장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었다. 


"결혼했다면서 왜 반지를 안 끼고 다니지?"


남편에게 쏠리는 의혹의 눈길이 분명 있었으리라. 이를 물리치려면 나름 해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아내가 제 반지를 잃어버렸거든요. 저는 새로 사서 끼고 싶은데 아내는 둘 다 끼지 말자, 그러더라고요." 


이렇게라도 말하고 다녀야 다들 의혹의 눈길을 거두는 것이리라. 


내가 남편의 결혼반지를 분실하기 전만 해도 사정은 다르다.


우리는 다른 부부들처럼 결혼식을 앞두고 결혼반지를 맞춘 것이 아니다. 두 남녀가 연애하던 시절 커플링으로 꼈던 18K 반지를 결혼반지로 탈바꿈시켰다. 이것도 내가 제안했다. 


비단 결혼반지만 생략한 건 아니다. 예물과 혼수는 물론 신혼여행도 없었다. 사진과 예식, 하객 식사만 겨우 챙겼다. 부모 도움 없이 둘만의 힘으로 결혼과 유학생활을 유지해야 했기에 남들 하는 걸 다 따라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양가 부모님과 결혼 당사자의 체면을 살려줄 만한 의식은 거의 모두 생략해야 했다. 


나는 귀금속에 그다지 관심도 없고, 액세서리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늘 운동과 함께 하던 생활 반경에서 액세서리는 거추장스럽고 분실 염려까지 있다. 격투기를 하면서 반지와 목걸이가 흉기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하면서 순금도 아닌 18K 반지를, 그것도 커플링으로 몇 년씩 끼던 헌 반지를 어떻게 결혼반지라고 우기냐?"


이렇게 경악하는 반응도 있었다. 


친정이나 시댁이 넉넉한 형편이라면 몰라도, 빠듯한 유학생 가족으로 살며 뭘 더 사서 끼우냐고 내가 반문했다. 결혼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쓸모보다는 주변의 눈 때문에, 분위기 때문에 혹은 관습적으로 소비하는 행위라면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우리처럼 단출하게 신혼을 시작하는 주변의 유학생과 서양 문화에서 받은 영향도 있다.


이러한 우리 부부의 세세한 사정을 들은 이는, 특히 남성들은, '최고의 로맨티스트다', '정말 아름다운 커플이네요'라는 반응이었지만, 남편의 반지가 없어지고는 그런 미담이 빛을 잃고 말았다. 이때부터 '결혼반지도 없이 다니는 남편이 불안하지 않느냐?'는 반응이 나왔다. 아마 현명하지 못한 아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결혼반지가 없으면 자동으로 미혼으로 간주하고 주변의 미혼 남녀들이 갑자기 달라붙기라도 한단 말인가? 

과연 유부남, 유부녀 불륜 로맨스는 결혼반지의 부재로 시작된단 말인가?


내가 남편의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사연은 이렇다.


사람이 살이 찌면 손가락도 굵어지고, 손가락 형태에 따라 반지 모양도 변한다는 사실을 남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애 아빠가 되면서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남편은 10kg 넘게 몸무게가 불었다. 왕성한 식욕은 그대로지만, 더 이상 20대 때처럼 줄기차게 공을 차며 몸의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아서다. 


연애 시절인 20대에 맞춘 반지가 20여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남편에게 맞을 리 없다. 큰맘 먹고 힘겹게 낑낑거려야 반지를 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지를 제때 빼내지 못하는 불편함보다, 남편의 건강부터 염려되어 나는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반지 없이 지내보라고 제안했더니, 남편이 순순히 반지를 건네줬다. 


문제는, 당시 이사를 앞두고 있던 어수선한 시점이라 반지를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다. 보석함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에, 임시방편으로 남편의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두기로 했다. 내 검지에는 느슨하고 엄지에는 꽉 끼는 형국이라, 한심하지만, 두 손가락에 번갈아 가며 끼는 것으로 버텼던 것 같다. 솔직히, 당시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 손가락에 남편의 반지가 머물던 시기는 그다지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남편...



유부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지위가 격상되고 주변의 인식이 달라짐은 서구 사회에도 있는 현상이다. 유부녀의 지위와는 분명 다르다. 이 때문인지, 남편은 어느 리어카에서 샀는지 못 보던 반지를 끼고 있었다. 중요한 회의나 모임이 있는 날 이걸 결혼반지처럼 끼고 나가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에이, 남편...

그런 리어카 제품을 낄 바엔, 차라리 이 반지가 더 낫지.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다.  


상점에서 아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 보길래 뭔가 했더니 무드 링이다. 반지 낀 사람의 기분에 따라 색깔이 변하기에 '무드 링 (Mood Ring)'이라고 부른다. 처음 반지를 끼던 날, 사진처럼, 두 사람 모두 '침착과 사랑 (Calm, Lovable)' 상태가 나왔다. 


색깔이 바뀌는 순간만 안 들키면, 좀 특이한 결혼반지라고 주변에서 믿을지도 모르잖아,라고 남편을 설득시켰건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른다고 한다. 

갖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에효...

걍...

예전처럼 반지 없이 지내자고.


커버 이미지: Photo by Sandy Milla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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