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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10. 2021

고양이와 영국의 정원, 그 애매한 애증의 관계

"앗, 귀 아파!"


산책을 하던 중 아들이 외치는 소리다.


근처 정원에서 나는 소리 때문이다. 지나가는 행인을 괴롭힐 정도의 소음이라면 신고해야겠지만, 10대 아들의 귀에만 쌩쌩하게 들리고, 40대인 나에게는 조금 거슬리게, 50대인 남편에게는 뭔 일 있었나 정도의 소리다.


아 어쩌랴, 가족 모두 전쟁터에 들어서고 말았다. 


영국의 주택가 정원은 인간과 고양이가 벌이는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잔인하게 피가 튀기고 괴성이 울리는 그런 살벌한 의미의 전쟁터는 아니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엔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고요함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과 이를 깨려는 고양이 훼방꾼을 매일 목격하는 나에게는 전쟁터로 보인다. 



자, 영국의 전쟁터를 구경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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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필요도 없이 대문만 나서도 전쟁터가 나온다. 


* 이 글은 고양이나 애묘인을 비난하기 위한 글도 제품 홍보도 아닙니다. 한국과는 다른 영국의 주택과 정원, 고양이 문화를 제 경험에 비추어 소개합니다.  


우리 집을 기준으로 오른편 이웃집 잔디에 위 사진과 거의 동일한 고양이 모형이 서있다. 검은 색깔 때문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다른 집에도 이런 모형을 간혹 볼 수 있다. 이건 고양이를 쫓아내기 전에 사람도 쫓아낼 수 있다. 내 반응이 그랬다. 


어느 날 집 대문을 잠그고 돌아섰더니 고양이 세 마리가 날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검은 고양이가 세 마리씩이나? 

그것도 저런 도발적인 자세와 사악한 눈으로?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처럼 고양이 모형에 놀라서 소리 지르는 일 말고, 아들이 들었던 것처럼 직접 소리를 내는 물체는 무얼까?



gardenworld.co.uk


↑이것이 바로 아들의 귀를 괴롭혔던 물건이다. 


고양이가 싫어하는 초음파 소리를 내는, 말 그대로 고양이 퇴치기다. 청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오른편 이웃집은 고양이 모형과 함께 이 초음파 기기도 설치했다. 이 정도면 전쟁터 중에서도 최전방에 임하는 자세다. 다른 이웃집에도 설치되어 있기에 산책하는 길목마다 비슷한 소리가 난다. 귀뚜라미가 귓전에서 울어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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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왼편 이웃집이 사용하는 스프레이다. 


주변에 뿌려두면 고양이가 싫어하는 냄새를 풍긴다고 한다. 고양이가 우리 집 텃밭을 망가뜨린다고 내가 하소연했더니 이걸 써보라고 추천해 줬다.



blog.gardeners.com


↑플라스틱 침이 달린 그물이다. 


뾰족한 감촉을 싫어하는 고양이 습성을 이용하는 그물이지만, 위 사진을 올린 사람은 다람쥐 퇴치에 썼다고 한다. 동네 곳곳에서 비슷한 설치물을 볼 수 있다. 주로 화단이나 텃밭 가장자리에 두르거나 아예 덮개까지 만들어 동물의 접근을 차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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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담장에 설치하는 플라스틱 요철이다. 


이 또한 고양이 습성을 이용한 셈인데, 담장을 타고 이웃집 정원을 넘어 다니는 고양이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이런 설치물도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다.



brownthumbmama.com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뾰족하게 솟은 포크가 요철의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솔방울과 오렌지 껍질 등 감촉이나 냄새 때문에 고양이가 싫어할 만한 것도 소개한다. 우리 집에서는 솔방울을 깔아봤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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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 감지 센서가 달린 스프링클러다. 


고양이나 개, 여우 등 작은 동물의 동작을 감지할 때마다 물을 뿌려서 이들을 쫓아낸다. 큰 동물 (사람)에게도 뿌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영국인은 왜 고양이와 전쟁을 벌일까?


영국인의 정원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집을 구하러 다니면, 특히 집주인이 직접 맞아주는 집에 가보면 정원 관리에 그동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가면 정원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 정규 코스로 들어가고 날씨만 괜찮다면 이곳에서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정도로 자랑할 만한 정원으로 가꾸려면 2~3주에 한 번씩 잔디를 깎아야 한다. 끊임없이 돋아나는 잡초를 뿌리째 뽑고 화단을 가꾸는 시간도 별도로 필요하다.


이토록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이건만 고양이가 말썽이다. 


화단의 꽃을 뜯어먹거나 밟고 지나간다. 그냥 밟는 정도가 아니라 확연하게 눈에 드러날 정도로 손상시킨다. 고양이가 담장 위에서 정원 바닥으로 착지하는 지점에 위치한 것은 식물이든 물품이든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정원에 세워둔 화분을 넘어뜨리고 화분 속 흙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건 다람쥐도 마찬가지다). 


모종을 옮겨 심은 텃밭에 고양이가 들어가서 화장실로 이용하기도 한다. 볼일을 보고 난 후 고양이가 땅을 파헤쳐 흙으로 덮어버리는 바람에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모종이 뿌리째 뽑힌다. 매일 아침이면 정원에 쌓인 고양이 응가를 치우는 일도 정원 관리에 포함된다. 해충 피해도 끊이지 않는데 고양이마저 자주 들르는 바람에 우리는 텃밭 농사를 진작 포기했다.


이 정도면 고양이와 전쟁을 벌일 만하지 않는가?


우리 가족은 이 전쟁에 소극적으로 참전했다가 곧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어지간히 많은 전쟁 물자와 전투력, 병력,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승산이 없겠다 싶어서 일찌감치 포기했다. 무엇보다 우리 집 정원은 다른 집에 비해 구석에 위치한 편이라 외부와 차단되는 아늑한 공간이 있다. 또한, 오른편과 왼편 이웃집까지 다들 고양이 퇴치 장치를 해두니 동네 고양이들이 우리 정원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영국인은 고양이를 싫어할까? 


Statista의 2020/21년도 통계에 따르면, 영국의 전체 가정 중 59%가 애완동물을 키운다. 그리고, 전체 가정 중 33%가 개를, 27%가 고양이를 키우는데, 두 애완동물의 개체수는 비슷하다. 주변에 고양이와 개가 흔할 수밖에 없다. 늘 묶여 다니는 개는 제외하고, 영국에서 정원 딸린 집에 살려면 이웃 고양이와 타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우리 집에 자주 들르는 젖소와 블랙베리, 호랑이다. 


이름은 우리 마음대로 붙였다. 갓 이사를 와서 텃밭을 가꾸겠다고 애쓰는 우리 가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고양이가 훼방을 놓으니 속상해하다가 나중에는 포기해 버렸다. 


그래, 너희들 아지트로 맘껏 놀다 가라. 우리는 텃밭 가꾸기만 포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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