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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pr 07. 2021

영국인의 오랜 과제, 비만과의 전쟁

"여러분, 제가 너무 뚱뚱했습니다."


영국 총리인 보리스 존슨이 한 말이다. 


한 나라의 정상에게 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보리스 존슨의 흔적이 담긴 자료는 비디오와 사진, 오디오 할 것 없이 모두 약간씩 우스꽝스럽다. 


국회 토론이나 대국민 연설, 기자 간담회까지 분명 진지한 내용이 오가는 상황임에도 그렇다. 언론인 출신이자 정치인 답지 않은 어눌한 말투와 썰렁한 유머, 말의 요지를 파악하기 힘든 화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리라. 어디 이뿐이랴. 늘 헝클어진 머리와 독특한 패션 감각, 웅크린 상반신까지 기존의 정치인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애매한 상황에 처한 정치인의 사진을 캡처해놓고 이들을 희화화하려는 영국 언론의 시도가 보리스 존슨에게서는 큰 노력 없이도 성공한다. 언제 어디서 찍어도 웃음을 유발할 만큼 그의 행동과 어투는 충분히 우습다. 존슨 자신도 대중에게 비치는 이런 모습이 오히려 만족스러운 듯하다.


그런 보리스 존슨의 태도가 여느 때보다 더 우스웠던 순간이 있다. 작년 10월,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하면서다.



@ AFP News Agency


예년 같으면 1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연례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누군가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을지 모른다. 그 웃음소리가 TV 화면으로까지 전달되고 시청자들도 같이 웃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 연설은 여느 때와 다르다. 


사상 처음 온라인으로 진행된 전당대회요, 영국이 직면한 현안 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코로나 해결인 만큼 이날 당 대표 연설에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제였다.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의 심각성을 몸소 체험한 사람으로 그 배경을 아는 이라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건강하고 날씬해진(?) 모습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이보다 6개월 전만 해도 보리스 존슨은 중환자실 신세를 졌다. 코로나 감염으로 증세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망자 보도가 연이어 나오는 시점이라 영국인들이 불안에 휩싸였다. 다행히 존슨은 입원한 지 일주일여 만에 퇴원했고 3주 뒤 업무에도 복귀했다. 


총리의 입원과 회복 과정을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그의 체중이 입방아에 올랐다.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비만이 코로나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입원할 당시 보리스 존슨은 키 175cm에 몸무게가 110kg가량 되었다. 혹독한 병치레를 하고 다이어트까지 하면서 12kg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도 비만이다. 자신의 체중이 코로나 증세를 악화시킨 주범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다이어트를 꾸준히 하겠다고 당 지지자와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약속을 한 셈이다. 여기에서도 그의 유머 코드는 빠지지 않았다. 


영국의 성인 중 60% 이상이 비만이거나 과체중이라고 한다. 어린이는 3명 중 1명에게서 이런 수치가 나온다. 비만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코로나로 인한 사망률이 높다는 통계도 있고, 그토록 많은 코로나 중증 환자와 사망자가 나온 영국의 기록만 분석해도 비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제 딸이 비만이라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한 여성이 절규하듯 온라인에 올린 글이다.


이 여성은, 초등학교에서 실시하는 신체검사에서 자신의 딸이 비만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이 같은 글을 올렸다. 


비만 판정은 신체 정보 입력과 함께 자동으로 나올 뿐이지 않은가. 영국의 학교에서 비만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학생이나 부모에게 불이익이 가는 것도 아니다. 이 여성이 분개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에게만 전달되는 자녀의 비만 여부를, 누구나 볼 수 있는 온라인에 공개해서 '우리 딸 비만이다!'라고 만천하에 고하는 행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건가. 


이 여성은 글과 함께 딸의 사진도 올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헐렁한 옷을 입은 상태라 판별이 애매하지만 날씬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이 여성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봤다. 남의 사생활을 캐는 행위지만, 전체 공개를 해두었으니 가능했다. 무슨 자신감에서 그런 글을 올렸는지 궁금했다. 


다양한 장소에서 찍은 가족사진, 딸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앞서 나온 글에 실린 사진보다는 훨씬 더 선명하게 딸의 체형이 드러났다. 노인들에게서 '복스럽게 생겼네.'라는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결코 건강한 체형이라고 할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여성의 글 밑으로 드러난 친구들의 반응이다. 일부 온라인 친구 존재가 그렇듯 글을 올린 사람과의 친분 때문에 내용과 상관없이 눌러주는 '좋아요'일 가능성도 있지만, 수백여 개의 좋아요에 이어 여성을 응원하는 메시지가 넘쳐났다. 한편, 비만 판정을 내린 학교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비만의 정의를 가르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XXX 선생님은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수고하는 분으로, 올바른 식생활과 체중 관리를 지도하십니다."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다.


교장선생님이 신입생들에게 양호 선생님을 소개하고 있다. 다 좋은 말씀이다. 


문제는...

교장선생님 바로 곁에 서있는 사람, 즉 방금 소개된 양호 선생님은 누가 봐도 비만이라는 점이다. 



"제발 이 남자한테 잔소리 좀 해줘요!"


남편의 건강 검진 날이다.


영국에서는 만 40세 이상의 국민을 대상으로 5년마다 무료 건강 검진을 해준다. 건강 검진이라고 해봐야 체중, 키, 허리둘레, 혈압 측정과 혈액 검사가 전부다. 여기에서 나온 수치를 바탕으로 정상치를 벗어난다 싶은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정도다.


당시만 해도 흡연자이자 과체중이던 남편을 향해, 누군가 건강에 신경 쓰라는 잔소리 해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건강 검진, 이날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나. 남편의 체중도 재고 허리둘레도 측정하고, 흡연자라는 사실도 밝혔으니 이제 잔소리만 들으면 된다.


제발 잔소리 좀...

하지만...

이 모든 기록을 담당하던 간호사는 과체중인 내 남편보다 훨씬 더 뚱뚱해 보였다. 


간호사만이 아니다. 우리 가족을 돌보는 주치의도 비만이었다.



"내가 왜 뚱뚱해?"


60% 이상의 성인이 비만 혹은 과체중이지만, 정작 자신이 뚱뚱하다고 인정하는 영국인은 이 보다 훨씬 적다. 각종 질병 특히 성인병 유발의 주범이요, 코로나 위험 요소로까지 지적되는 비만 문제를 사람들이 제발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평소에도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웃음을 선사하는 보리스 존슨 총리가 그 육중한 몸으로 힘겹게 뛰고 운동하느라 더 우스꽝스럽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런 모습으로라도 국민들에게 체중 관리의 중요성을 알리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보리스 존슨은 물론 그 외 많은 이들의 다이어트 성공을 기원해 본다. 


                       Twitter...............RINewsToday............London Cycling Campa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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