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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pr 11. 2024

3명의 의사를 만나고서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애도 하나뿐이지 두 사람 나이도 어리고, 또... 어... 사람 관계가... 나중에..."


나와 남편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하던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쉽게 꺼내기 힘든 말이다. 지금은 부부라 해도 미래에 둘 사이가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덜컥 수술을 해버리는 건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이 말이겠지. 그런 말을 부부 면전에 대놓고 하기는 쫌.


아들이 태어난 지 6개월 정도 될 무렵, 나는 정관 수술을 받도록 남편을 설득한 뒤 함께 병원을 찾았다. 영국의 의료 체계에서는 주치의 상담을 거쳐야 수술 병원으로 연결시켜 준다. 다른 전문의를 만나려 해도 마찬가지다. 


자녀 하나만 둔 젊은 부부가 영구 피임을 하려고 나서니 의사 입장에서는 만류하고 싶었나 보다.


사실, 의사가 뭐라고 하든 우리가 원하는 바를 강행시킬 수는 있다. 나이와 결혼 여부, 자녀 유무에 상관없이 당사자의 의견만 가지고 피임 수술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사자인 남편이 내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들에 이어 딸까지 원하는 남편과 애 하나면 충분하다는 나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편에게 수술을 요구하고 있으니 의사와 남편 중 누구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처럼 병원행을 달가워하지 않던 남편은, 상담이 시작되기 전부터 엉덩이를 들썩거리더니, 애가 하나뿐이니 뭐니 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있다가는 의사가 아내 말에 설득당할지도 모르니.


이대로 물러 설 수 없다 싶었던 나는 마지막까지 남겨둔 차선책을 꺼냈다.



"그럼, 제가 XXX 시술을 받을까 하는데요"


수술을 안 받겠다 버티는 남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덜컥 임신하는 상황에 이르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이 수술을 안 받겠다 나올 권리가 있다면 나는 임신을 하지 않겠다 주장할 권리가 있지 않겠나.


내 말에 의사가 놀라는 표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교적 덜 알려진 피임 장치인데, 그 이름을 거론하는 나의 정보력 때문인지? 혹은, 수술을 진행하지 않겠다 결론이 나자마자 곧바로 차선책을 들이대는 나의 치밀함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남편의 수술을 상담하러 갔다가 내 몸에 피임 장치를 하기로 결론이 났고, 며칠 뒤 나는 시술을 받았다. 



"엄마 닮은 예쁜 딸 있으면 좋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정관 수술에 대해 첫 상담을 받은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다. 


딸을 원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이런 말을 하겠지만 남편은 둘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자 한 말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얼마나 피곤한지 그도 깨달았기에. 


그동안 남편의 신분은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남편의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가족 모두 이사를 갔다. 당연히 병원도 주치의도 달라졌다.


아들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남편과 나는 40대로 접어들었다. 우리 나이에 가정을 꾸리고 출산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노산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는 못할 테다. 이 또한 당사자가 결정할 일인데, 출산 당사자인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기에 남편은 수술을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받아들였다. 


이런 시기에 의사가 '애도 하나뿐이지 두 사람 나이도 어리고'라는 말로 우리 계획을 단념시키지는 않으리라 확신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계획이 틀어졌다. 


10여 년 전과 동일한 의도로 진료실에 앉아 정관 수술에 대해 문의하는데, 컴퓨터가 놓인 책상으로 의사가 몸을 돌리더니 인트라넷 화면처럼 보이는 곳에 접속하여 무언가 입력하기 시작했다. 



"소수이긴 하지만 수술 부작용을 겪는 사람이 있거든요. 1천 명당 X명..."


수술 부작용이 어떻게, 어느 비율로 발생하는지 의사가 정보를 찾아내 읽어줬다.


정관 수술이 아니더라도, 부작용은 모든 의료 행위에 깔려 있는 전제사항이지 않은가.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나 치료법, 약물 처방이라도 부작용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를 의료 관계자가 통보할 의무는 있다. 그런데, 우리와 마주한 의사는 부작용을 감수하고 수술을 받으라, 가 아닌 부작용이 무서우니 수술받지 말라는 뉘앙스를 팍팍 풍겼다. 

 

부작용 무섭다고 수술받지 말란 말인가? 

그럼, 그런 수술을 하는 의사와 병원은 왜 존재하냐고?

부작용을 알고도 수술받는 사람은 다 멍청이냐고?

당신이 하는 의료 행위에는 부작용 없냐고?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술을 자신에게 닥친 운명으로 받아들이려 하던 남편의 태도가 싹 달라지며 10여 년 전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겨우 어렵게 끌고 와 진료실 의자에 앉혀두었던 엉덩이가 다시 들썩거렸다. 


의사가 등을 보인 채 컴퓨터 화면 속 정보를 읽어가며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동안 나는 진료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출입문 근처에 걸어둔 가죽 잠바가 눈에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주로 입는 듯한 스타일로 색상도 화려하고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 서랍장 위에는 헬멧도 놓여 있었다.


오토바이 타는 사람을 모두 싸잡아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오토바이와 고급 가죽 잠바, 헬멧까지 자유를 만끽하는 남자들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 임신을 두려워하는 아내를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수술대에 오르면서까지 남성성을 중단하려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선입견이니 오토바이를 사랑하는 분들, 나의 무지를 용서해 주길. 10년 넘게 기다려온 내 계획이 물거품 된다는 절망감 속에서 화풀이할 대상은 오로지 오토바이뿐이었으니.


이번에도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안 그래도 수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부작용이라는 말을 듣고도 자리에 남아 있겠냐고.


그렇게 세월은 또 흘러갔다. 남편은 딸을 얻겠다는 미련은 완전히 떨쳐버렸지만 수술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안은 채 다시 상담에 임했다. 



"정관 수술요?"


이번에도 의사가 책상에 놓인 컴퓨터로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3년 일을 떠올리게 했다. 같은 병원이요 의사만 다를 뿐이다. 물거품 되려나?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내 편이 없다면 남편 대신 나라도 수술을 받겠다 결심하고 나선 길이었다.



"일정을 언제로 잡으면 좋겠어요?"


수술 부작용에 대해 길게 연설하려나 싶은 순간, 날짜를 들먹이는 것이 아닌가. 


의사가 보고 있던 건 환자 기록이 담긴 화면이었다. 남편의 나이와 건강 상태, 가족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말이다.


드디어 내 편이 생기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이미 나는 4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으니 아무도 내게 출산을 더 하라 강요할 입장이 아니었다. 3년 전과는 딴판이 된 상담 분위기에 마음을 놓은 뒤 진료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책상 귀퉁이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열 살 전후의 여자아이 2명이 웃는 모습이었다. 의사가 얼마 전 출산 휴가를 끝내고 복귀했다고 하더니 그럼 애가 3명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남편의 정관 수술을 요구하려는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지 않을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편을 한 명 더 만났다.


남편은 예정대로 수술을 받고는 그토록 걱정하던 1천 명당 X명 꼴로 발생한다는 부작용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대수술까지 받은 고귀한 존재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온갖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혹사하면 대형 사고라도 날 것처럼 자신에게 떨어진 집안일을 아들한테 떠넘기면서. 


이런 아빠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아들이 아니다. 중학생이 생각해도 간단하다 싶은 수술인데, 그걸 받고도 온갖 엄살을 피우는 사람은 당연히 놀림 대상이 되고 만다.



"아빠는 이제야 그 수술받았어요?"


커버 이미지: Photo by Olga Guryanov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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