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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pr 04. 2024

해외에서 한국 영화를 보면 생기는 일

"하하... 허허... *+&)_#^@"


다들 웃음을 터뜨리는데 우리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들의 웃음이 조금 사그라들 무렵에야 남편과 나의 웃음보가 터졌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는 우리 두 사람만 키득대기도 했다.


영화 <기생충>을 보고 있을 때다.


영화관에 모인 대다수의 사람이 웃을 때 우리 부부만 뒤늦게 웃거나 혹은 그 반대거나 하는 상황이 자주 이어졌다. 영화 속 대사를 이해하는 시차 때문이리라.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고 언론과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 연일 화제가 될 무렵 영국에도, 그것도 내가 사는 동네까지 진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에서 개봉한 지 9개월 여 만의 일이다. 


발렌타인 데이를 기념해 남편과 같이 보겠다 고른 영화 치고는 엉뚱하다 싶지만, 그리고 마침 2월 14일에 맞춰 개봉한 <엠마>가 더 적절한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제인 오스틴 작가보다는 봉준호 감독의 실력을 믿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영국에 살면서 한국 영화를 꾸준히 보고 있지만 영화관에 가서 본 건 손에 꼽힐 정도다. 아들의 경우 한 번도 기회가 없었다.


영화가 보고 싶어도 영국에서 상영하는 한국 영화가 많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대도시에 위치한 예술 영화관이나 한인 타운을 찾는다면 더 많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겠지만, 영화 하나 보려고 그 먼 걸음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외에도, 영국에서 한국 영화를 감상하려면 각오해야 할 불편함이 있다. 



"와... 광고 절묘하네"


내가 웃으며 말해놓고 스스로 무안해졌다. 


작은 일에도 잘 놀라고 쉽게 웃는 성격이긴 하다만 나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고, 웃는 이유를 모를 테니 조심스러워서다. 영화도 아니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나오는 광고를 보고 웃다니.


손흥민 선수가 나오는 라면 광고였다. 


영국인에게도 이미 익숙한 얼굴인 데다 마트에도 간혹 판매되는 제품이 담긴 평범한 광고가 왜 웃기지? 그 이유를 유추하기는 힘들 테다. 영화에서 라면 장면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광고마저 라면이 나오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군중 속에서 혼자 웃는 일은, 특히 대다수의 사람으로부터 공감받기 힘든 웃음이라면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혼자만 웃음을 터뜨리면 사오정으로 취급받지 않겠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내용을 파악하는 우리 부부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화면 속 자막을 보고 내용을 파악했을 테다. 


한국어와 영어는 언어 구조가 다르기에 핵심 단어를 조금씩 다르게 배치해야 번역이 가능해지기 마련이다. 영화 자막 번역은 다른 매체 번역과 달리 글자수와 문구 배치에 여러 제약이 주어지므로 이에 맞추다 보면 전체 맥락은 동일하더라도 당장 배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자막이 어긋날 때가 있다. 


배우의 억양이나 사투리 구사까지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하지만 이를 감지하는 것도 오직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관객은 침묵을 지키는데 우리 부부만 웃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설령, 다 같이 웃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웃는 시점과 '그들'이 웃는 시점은 일치하지 않았다.  


자기 집 안방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축구 경기를, 무더위에 길거리로 나가 수천여 명의 낯선 사람들과 어우러져 보려는 사람의 심리를 생각해 보라. 나와 같은 감동 코드를 지닌, 같은 언어와 문화적 공감대를 가진 사람과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해외에 살면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 힘들다.



"그 영화는 쫌..."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보러 가자고 했더니 남편이 거절했다. 발렌타인 데이에 범죄 영화를 추천한 아내를 벌주려는 것 같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기도 하지만 기생충에 이어 2년 반 만에 또 한국 영화가 우리 동네까지 진출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꼭 보고 싶었다. 그럼에도, 남편의 성향을 알기에 포기해야만 했다. 나 홀로 영화관을 다녀올 만큼 영화광은 아니기에.


내가 사는 작은 도시까지 진출할 정도의 한국 영화라면 봉준호, 박찬욱처럼 해외에서 알아주는 유명 감독이 만들고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며 화제가 된 작품이다. 대부분 스릴러, 범죄 영화가 주를 이루며 미성년 자녀와 보기 힘들다. 가족 영화나 로맨틱 코미디를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성향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영국에서 볼 수 있는 한국 영화 자체가 한정적인데 그나마 가족 모두가 즐길만한 영화를 고집한다면 선택의 폭은 더 좁아지고 만다.



"으 추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고 있을 때다.


종교 행사도 아니고 한인 행사도 아닌데 집 근처 교회에서 상영한다고 했다. 


괴물의 영어 제목인 <The Host> 안내문이 건물 입구에 붙어 있길래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했지만, 교회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과연 이곳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걸까, 싶었다. 


우선, 정식 영화관이 아닌 교회 건물이니 상영장 분위기부터 생소했다. 연단 뒤쪽에 스크린이 보이고 2층에는 영사기가 놓여 있긴 한데 이건 대형 교회라면 으레 갖추고 있는 시설이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 이날 관람객은 우리 부부 말고는 낯선 남성 한 명뿐이었다. 자리를 안내해 주는 사람도 없고 기기를 가동하는 사람도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다행히 시간이 되자 영화는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2층짜리 교회 건물에 달랑 3명의 관객이 앉아 있기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안락한 소파와 냉난방 시설을 갖춘 영화관이라도 객석이 텅 비어 있으면 썰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라도 영국에 오니 특히 우리가 살던 작은 도시에서는 썰렁한 분위기에서 감상해야만 한다.



"와, 초월 번역 대단하네"


어느 특정 영화는 아니고, 영국에서 본 한국 영화라면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영국에서 상영하는 작품이니 영어 자막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내가 한국 영화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 여긴 구실이 된다. 자막 유무와 상관없이 화면 속 장면과 배우의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은연중 내 눈은 자막으로 향하게 된다. 외국 영화를 볼 때 생긴 습관이기도 하지만 내 직업병도 한몫해서다. 한국어 대사와 영어 자막이 일치하는지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 지니까.


번역가로 일하다 보니 내게도 간혹 영상물 번역 의뢰가 들어온다. 나의 경우, 한국 영화가 아닌 영어권 영상물을 한국어로 옮기는 일을 하므로, 한국 영화에 영어 자막을 다는 사람과는 작업의 성격과 규모가 다르다. 그럼에도, 같은 한국어라도 이 영화는 어떻게 표현했을지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영화 <기생충>에서 짜파구리를 만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짜파구리'라는 말을 'Ram-Don'으로 표현한 사례가 대표적인 초월 번역이다. 라면 (Ramen)과 우동 (Udon)의 각 영어 단어가 합쳐져 Ram-Don이 탄생했다. 짜파구리의 본 의미와는 다르지만 한국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의역한 셈이다. 이 신조어는 영화 대사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음식으로 소개되어 인터넷에 요리법과 영상이 다양하게 나와 있다.


짜파구리 말고도 '저 말을 저렇게 옮길 수도 있구나, 오 신선한데'라고 생각에 잠기곤 하니 내용에 집중하기 힘들어진다. 내가 영어공부 하러 영화관에 온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영화에만 집중하자고!


커버 이미지: Photo by Pavel Danilyuk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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