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숙진 Apr 18. 2024

나무 수저를 상으로 준다고요?

"우리 팀이 역대 최저 성적을 기록했지!"


A가 자신의 소셜 계정에 사진과 함께 남긴 글이다.


학부모 퀴즈 대회에 참가했다가 팀원들과 웃고 떠드느라 정답 맞히기에는 실패했나 보다. 전체 참가자 중 꼴찌를 차지하고는 퀴즈에 동참한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아들이 예전에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열린 대회라 사진 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팀 대표인 A가 나무 주걱을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띄었다. 


비록, 대회에서는 꼴찌를 했다 해도 이들의 만남 자체는 부러웠다. 학기 중간에 남편의 직장을 따라 타 도시로 이사를 오면서 아들도 학교를 옮겼기에 다른 학부모들과 친해질 틈이 없어서다.


당시만 해도 A가 들고 있는 나무 주걱을 그저 우스꽝스러운 대회 상품이라고만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언어유희였다. 



get the wooden spoon

* 꼴찌를 하다



전형적인 영국식 농담으로, 시험이나 대회에서 꼴찌를 한 사람에게 실제로 혹은 상징적으로 주는 상을 가리킨다.


친숙한 얼굴의 인사 중 나무 주걱을 상으로 받아 화제가 된 적 있다.


아니, 이제부터 나무 주걱 대신 나무 수저라 부르겠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wooden spoon을 나무 주걱이라 불렀는데, 아래 사진을 보면서, 또 더 많은 사진과 관련 자료를 찾아내면서 주걱이라는 명칭을 수저로 바꾸기로 했다. 



born with a silver spoon in your mouth

* 부잣집에 태어나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



영어 표현에서 시작되어 한국에서 더 흔하고 다양하게 사용하는 은수저, 금수저, 흙수저와 마찬가지로 이 wooden spoon도 수저의 일종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듯해서다.




thesportsman.com

 


↑ 영국의 왕세자비 케이트 미들턴과 그의 남편 윌리엄 왕세자다.


2019년, 즉 당시만 해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살아 있을 때니, 케이트 왕세손비와 윌리엄 왕세손이 자선 행사로 진행된 보트 대회에 나갔을 때다. 


부부가 각자 다른 팀에 합류하여 총 8개 팀이 경합을 벌이는데 왕세손비가 속한 팀이 꼴찌를 하는 바람에 이렇게 케이트가 대표로 나가 나무 수저를 받은 것이다.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한 선수 입장에서는 받기 민망한 상이지만, 왕세손 부부가 참여하면서 수많은 언론과 관중의 관심을 모으고 꼴찌 상을 받고도 환하게 웃으니 주최 측에서는 효과 만점이었으리라.




꼴찌를 한 사람에게 왜 나무 수저를 주는 걸까? 



wikipedia.org



↑ 190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졸업식에서 초대형 수저를 들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다. 공식적으로 상을 수여한 마지막 사례다.


나무 수저 전통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과에서 최하위 성적을 기록한 학생에게 수저를 전달하면서부터다. 이후 학교는 물론 스포츠 현장까지 꼴찌를 기리는 전통이 생겨나고 다른 영어권 국가로까지 전통이 퍼졌다.


꼴찌에게 나무 수저를 주는 전통의 시초가 된 상은 이미 오래전 공식적으로 없어졌지만, 아직도 럭비를 비롯해 테니스, 축구, 크리켓, 네트볼, 조정 등의 스포츠 현장에서는 나무 수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skysports.com


↑ 누가 꼴찌 트로피를 들어 올릴 것인가?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6개국 선수가 참가하는 럭비 국가 대항전인 '식스내이션스챔피언십 (Six Nations Championship)'에 관한 기사다.


어느 팀이 우승할까, 가 아닌 어느 팀이 꼴찌를 할까에 주목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전체 참가국 중 가장 마지막인 2000년에 챔피언십에 합류한 이후 지금껏 최다 꼴찌를 기록했다. 다행히, 지난달에 막을 내린 2024년도 대항전에서는 웨일스에 나무 수저를 떠넘겼다.


학교나 스포츠 현장이 아니더라도, 앞서 예로 든 퀴즈 대회처럼, 일반인이 친목 도모를 위해 혹은 자선 행사로 치러지는 행사에서도 재미 삼아 나무 수저를 건네기도 한다.


영국식 농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경쟁에서도 나무 수저를 상으로 주고 있다. 



thisismoney.co.uk



↑ 소비자가 선정한 최악의 고객 서비스 업체는?


영화계에 골든 라즈베리 상이 있다면 영국에는 나무 수저 상이 있다. 최악의 영화와 영화인을 가려내어 상을 준다면, 최악의 고객 서비스 업체에도 무언가 줘야 하지 않겠나.


영국의 경제 뉴스 전문 웹사이트인 'This is Money'에서는 매년 소비자가 뽑은 최악의 고객 서비스 업체 명단을 공개해 나무 수저 상을 수여하고 있다. 주로 영국의 국영 기업과 대기업이 심사 대상이 된다. 


수상자 명단에 오른 업체가 직접 상을 받으려 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위 사진처럼 포토샵으로 편집한 업체 대표 얼굴을 웹사이트에 싣고 있다. 


커버 이미지: pinterest.com


이전 13화 3명의 의사를 만나고서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