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숙진 Oct 25. 2024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는 영국 수험생의 일과

OO월 OO일 수요일


방과후 수업이 있는 날이다.


예전부터 두 과목이나 수업을 추가로 듣고 있는데 졸업시험을 앞두고 한 과목 더 늘었다. 평소에는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3시에 학교가 파하지만, 일주일에 세 차례나 4시까지 학교에 남아야 하는 셈이다. 이런 부담스러운 일정에도 엄마는 집에서 내준 숙제도 하고 일기까지 쓰라고 한다.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엄마가 수험생의 고충을 알기나 할까?


내가 집에서까지 이토록 공부에 시간을 쏟는 걸 알면 친구들이 놀릴 텐데 걱정이다. 안 그래도 아시아계 부모의 높은 교육열을 아는 친구들이 '너도 집에서 맨날 공부만 하냐?'라는 소리를 내게 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빠와 함께 책 낭독을 한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시간이다. 책을 낭독하면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에 좋다고 엄마가 추천한 방식이다. 덕분에 그토록 지루하게 다가오던 <주홍글씨>와 <사피엔스>도 완독했다. 


처음에는 엄마와 하던 낭독 시간이지만, 휴직하는 동안 아빠가 대신 맡아서 하게 되었다. 감히 시도해보지 못하던 어려운 책을 술술 읽어내자 뿌듯했는지 직장에 복귀한 후에도 아빠가 계속 맡아서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려운 책인 만큼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아빠가 꾸벅꾸벅 졸 때도 있다. 그렇게 졸면서 읽은 책이건만 아빠는 자기도 <주홍글씨> 읽었노라 자랑스레 말하고 다닌다. 


책 낭독과 피아노 연습이 끝나면 자유 시간이다. 내 방에서 인터넷 강습을 듣거나 체스 게임을 할 때도 있고 코딩도 한다. 아, 이거 점점 흥미로워지는데 싶으면 벌써 운동할 시간이다.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자리이니 시간을 꼭 지키라고 엄마가 강조한다. 우리 집은 군대 같다. 맨날 같은 시간에 다들 한자리에 모여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하니까.


숙제와 공부, 독서, 운동까지 마치고 나니 밤 9시다. 드디어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수험생의 삶이란 피곤함 그 자체다. 자리에 누우면 곧바로 잠들기 일쑤다. 고단한 하루다.  



OO월 OO일 금요일


드디어 졸업시험 시간표가 나왔다. 


10개 과목의 시험을 27회에 걸쳐 치르며, 5월 중순에 시작해 장장 6주가 소요된다. 맙소사, 두 개 과목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잡힌 것도 있다. 내가 호그와트 마법 학교의 헤르미온느냐고. 시간을 돌려서라도 시험을 치라는 거야, 뭐야. 


시간이 겹치는 과목은 별도로 시험 시간을 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루에 두 과목씩이나? 3시간 넘게 시험을 친다고? 졸업시험 치다가 사람 잡겠네, 잡겠어. 



OO월 OO일 토요일


도서관에서 체스 게임을 하자고 잭이 연락해 왔다. 


엄마에게 말했더니 도서관에서 체스를 해도 되냐며 놀라서 묻는다. 그렇다고 가지 말라고는 안 한다.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도서관 문 여는 시간인 10시에 맞춰 친구들과 만날 거라고 하니, 게임이 길어지면 점심을 먹고 와도 된다고 했다.


잭이 체스판을 챙겨 오기로 되어 있어 나는 홀가분하게 빈 손으로 도서관에 갔다.


체스판은 두 개를 준비했지만 일행은 세 명이라 잭과 내가 한 판, 잭과 샘이 한 판, 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며 경기를 했다. 아까부터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초등학생에게 같이 해보겠냐고 내가 제안해서 이후 4명이서 자연스럽게 경기를 할 수 있었다.


한창 체스에 몰두하고 있는데 낯선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학생 여러분 도서관에서 체스 경기를 하다니 좋은 아이디어네요. 저는 XX 지역 시의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에게 명함을 한 장씩 내밀었다. 우리가 체스를 하는 동안 도서관 한편에 묵묵히 앉아 있던 사람인데, 주민들과 면담 시간을 가지나 보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심심해 보이긴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도서관 사서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체스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 도서관에서 클럽으로 만들어 주변에 홍보도 해줄 수 있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사서가 우리 일행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도서관에 체스 클럽이 생긴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우리가 정기적으로 참여한다는 보장도 없고 해서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얘들아 우리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OO월 OO일 토요일


다림질할 시간이다.


거실에 다리미판과 다리미를 꺼내놓고 빨래 건조대에 걸린 교복 셔츠를 가져왔는데 바지가 안 보인다. 엄마에게 물었더니 어두운 색 옷만 모아서 세탁하는데 그걸 일요일에 하려고 미뤄뒀다고 한다. 오늘은 토요일, 벌써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니 지금 세탁한다 해도 너무 늦다. 일요일마다 하던 다림질을 토요일로 당겨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엄마가 제안해 놓고 스스로 잊어버린 것이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지난주 입었던 바지를 펴서 월요일에 다시 입고 갈 수밖에. 



12월의 어느 날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방학 첫날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모여 놀기로 했다. 처음에는 고카트를 하려 했더니 이용료가 비싸고 장소도 멀어서 그만두었다. 대신, 쇼핑센터 근처에서 방탈출 게임을 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신경 쓰이는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에 가야 하냐고 엄마가 걱정한다. 좁은 실내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릴 텐데 그것도 괜찮냐고 따진다. 백신도 이미 한 차례 맞았고 마스크도 꼭 착용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를 설득했다.


한 시간 여 동안 진행된 방탈출 게임을 마치고 근처 오락실에 들러 게임을 하며 놀았다. 저녁까지 먹고 친구들과 헤어져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니 밤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날 찍은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줬더니, '하루 종일 친구들과 놀면서 어떻게 사진 한 장 밖에 안 찍었냐?'며 신기해한다. 내가 사진 찍으러 간 것도 아닌데 엄마는 정말 이상하다.






지금은 대학 신입생이 된 제 아들이 영국에서 수험생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일과를 아들 입장에서 기록해 봤습니다. 3년 전 중등학교에 다니던 때입니다.


한국에서라면 고2의 나이에 해당하며 졸업시험인 GCSE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 시험에 통과해야 대학준비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학준비반을 마칠 무렵에는 또 다른 졸업시험인 A레벨을 쳐야 하고요. 


GCSE와 A레벨 모두 대학 지원 시 성적이 반영되기에 무시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한국의 수능시험 역할을 하는 셈이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도 아들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였는데, 학교 과제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니 집에서 내주는 과제는 줄여달라고 해서 그러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밤 9시면 잠자리에 들고 학원이나 과외도 없었고요. 


자녀를 영국의 명문대에 입학시키려 애쓰는 다른 가정과 비교하면 상당히 느슨한 편이긴 합니다. 또한 교육열이 비교적 낮은 편인 영국의 가정과 비교해도 너무 방관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는데, 이만큼 하는 것도 힘겹다고 아들이 토로하더군요. 제가 보기엔 설렁설렁하는 자세지만 나름 열심히 한다고 아들이 자부하고, 학교에서도 인정받는 학생이라 더 이상 간섭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부부의 경험을 들려주면 아들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더 힘들게 공부하는 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나 봅니다. 


커버 이미지: telegraph.co.uk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