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arkjudan
Sep 26. 2024
다행인 건 농장에는 나뿐만 아니라 흐린 눈 들이 매우 많다. 비난과 혐오가 일상이 된 자들. 자아란 없고 희생만 있는 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실상은 더 악하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료를 이용하거나 속이는 건 다반사였고, 누군가 본인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수확량을 얻는다면 시기와 질투를 느끼며 괴롭히고 그것을 본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곳에서 진정한 친구를 찾는다는 건 매우 어렵다. 서로 잘해줄 필요도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수확량만 채우면 된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그나마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인 제로가 이야기했다.
“주단 그거 들었어? 요즘 폐기의류 때문에 골머리인데 화성에서 상류층들이 지구에서 해결책이 되는 원단재료를 구한데 근데 지들이 병 걸릴까 봐 오기는 싫고 현상금을 걸었나 봐, 만약 그 해조류를 찾는다면 우린 평생 먹고 놀 수 있데.. 미쳤지? 그런 게 정말 있을까?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농장일 그만두고 바로 가겠는데..” “해조류....”
난 특유의 풀린 눈을 한 채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안 봐도 어마어마한 금액이겠지? 찾는 사람은 정말 좋겠다. 다이빙이라면 나도 좀 하는데..’
“근데 제로 그 정보 어디서 들었어?”
“통합국에서 지금 광고 엄청하고 있어 너만 모르지!!”
제로는 내가 귀엽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나도 퇴근하고 자세히 봐야겠군! 뭔가 일할 기운이 난다. 근데 배가 엄청 고파 점심 먹으러 갈까?”
일을 마치고 돌아와 통합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꿈에 원단 오염 걱정 없는 원단 갈리비아 해조류 원단의 재료인 갈리비아 해조류를 찾아주세요. 사례비 7조 원! 꿈에 원단 오염 걱정 없는 원단 갈리비아 해조류 원단의 재료인 갈리비아 해조류를 찾아주세요. "
"꿈에 원단 꿈에 해조류군 갈리비아 해조류... 어떻게 생겼는지나 볼까? 위키백과사전 갈리비아 해조류... 갈리비라 해조류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사라진 해조류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하는 종이다."
그렇게 꿈에 원단 꿈을 꾸며 난 잠이 들었다. 다시 농장으로 향한다. 검은 연기가 땅끝을 넘실대며 흐르고 있었다. 태양은 한낮에도 회색 장막에 가려 거의 빛을 내지 못했다. 농장에 드리운 희뿌연 안갯속에서, 나는 마스크를 깊게 눌러쓰고 거친 흙을 손으로 더듬어 파헤쳤다. 손에 쥔 씨앗을 땅에 심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때는 푸르던 그 하늘이, 이제는 잿빛으로 가득했다.
“주단, 아직도 거기 있어?”
제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씨앗 한 알을 더 심고 일어났다. 제로는 그보다 더 낡고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보호복 너머로 어두운 눈빛이 번뜩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쟁반에 씨앗을 내려놓고는 낡은 가죽 의자에 앉았다.
“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이 땅은 더 이상 살아나지 않아. 이건 다 화성 놈들 배 채우는 거야. 우리 먹을 건 점점 줄어들고 있고. ”
제로는 그 말에 말없이 씨앗을 또 하나 땅에 심었다.
“화성에 가고 싶어?”
제로가 물었다. 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흙 속을 바라보는 동안, 농장 전체가 침묵 속에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모르겠어. 가면 뭐가 달라질까? 저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잖아. 우리가 화성에 가면 거기서도 노예로 살겠지. 예전엔… 말이야, 이 땅이 푸르렀어. 여름이면 밀밭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가을이 오면 과일나무가 무겁게 열매를 맺었지. 바람이 불면, 향긋한 내음이 나곤 했어. 한 번쯤 그런 날들 다시 와줄까?"
“그때는 정말 그랬어?”
제로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어디서 봤어?”
“과거 메모리에서 생생하게 봤어.. 정말이었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게 땅에서 나왔지. 비옥한 흙 속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 시간만 지나면 먹을 게 생겼어. 이젠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는 황폐해진 이 땅을 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한 조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며 두려움 속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식량이 풍부했던 시절은 그에게는 먼 전설처럼 들렸지만, 그 기억이 지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주는 작은 위안이 되는 듯 보였다. 우리는 해가 지고 나서도 여전히 불 앞에 앉아 있었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은 그들의 얼굴을 비추며 어둠을 겨우 밀어냈고, 그들 주위로 황폐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은 건조하고, 먼지와 부서진 잿더미를 실어 날렸다. 제로에게 또 한 번 말을 걸었다
“식량이 넘쳐났던 시절 말이야. 그땐 이 땅에서 사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구걸하지 않았겠지?"
제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이들이 먹을 게 없어서 길거리로 나오는 일은 없었겠지.”
내가 다시 말했다.
"난 그 애들이 자꾸 생각나."
제로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도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구걸하더라. 아무것도 없는 얼굴로, 꼭 죽은 듯한 눈으로. 그 애들이 살아갈 미래는 어떨까…?”
나는 제로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에도 그런 장면이 사무치게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가 먹을 걸 찾아 울부짖는 현실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예전 이야기를 계속하던 중, 무심코
"비만..."
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순간 제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비만…?”
제로가 낯선 단어를 되뇌었다. 그의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그게 뭐야?”
나는 제로의 반응에 잠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
“비만… 그건, 사람들이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과하게 찌는 상태야. 몸이 무거워지고, 건강에도 안 좋아. 예전에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지.”
제로는 설명을 듣고 더 의아해졌다. 그는 먹을 것이 부족한 세상에서 자랐기에, 누군가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를 겪는다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어?”
제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우린 항상 음식을 찾는 게 가장 큰 문제잖아.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먹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땐 음식이 넘쳐났어. 사람들이 원하면 언제든 먹을 수 있었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아도 그냥 먹었어. 재미로 먹거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먹기도 했고."
제로는 머릿속에서 그려보려 했지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늘 배고픔과 싸우는 일이었고, 음식은 필사적으로 구해야 하는 자원일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으면, 병에 걸리기도 했어. 지금은 먹을 게 없어서 굶는 게 문제지만, 그때는 먹을 게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가 있었지. 그게 비만이었어."
제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병에 걸린다는 건... 너무 이상해. 지금은 먹을 걸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예전엔 그런 게 문제였다니. 그 사람들은 우리가 겪는 배고픔이 어떤 건지 전혀 몰랐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때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있었어. 배고픔이 아닌, 과잉이 문제였으니까. 사람들이 음식이 넘쳐나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그만큼 아끼는 마음도 적었지. 하지만 결국 그렇게 지구는 더 황폐해졌어.”
제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불꽃을 바라봤다. 그에게 비만이라는 개념은 너무 멀리 떨어진,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세상은 너무나도 부유하고 풍족해서 상상조차 어려웠다.
"참, 이상한 세상이었겠네, "
제로가 중얼거렸다.
“이제는 먹을 걸 많이 먹는다는 것 자체가 꿈같이 느껴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나와 제로가 과거의 이야기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지면이 흔들리며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단순한 천둥소리와는 전혀 다른, 무거운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충격적인 소리였다.
“뭐지?”
제로가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바람이 불어와 먼지와 잔해를 날리며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우리는 불길한 예감에 빠져 즉시 온실 농장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온실은 그들이 어렵게 구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미 먼지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무언가 큰 사고가 난 듯, 공기 중엔 타다 남은 고기 냄새와 함께 화학 물질의 독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온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쪽 벽이 거대한 폭발로 인해 부서져 있었고, 유리 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초록의 식물들은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수확을 기다리던 농작물들이 잿더미 속에 묻혀버린 모습이었다.
“아니!!”
목소리가 떨렸다. 제로의 얼굴은 충격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숨이 막혔다. 우리는 온실에 들어가 잔해 속에서 남아 있는 채소를 찾으려 애썼지만, 불길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해!”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고함쳤다.
“빨리 대피해!”
농작물은 이제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온실이 폭발한 지 불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서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반짝였고, 한때 생명의 색으로 가득 차 있던 땅은 검은 재로 덮여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무너진 온실을 바라보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 모두 폭발의 여파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그 자리에 남겨진 폐허가 차갑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게 재가 되어버렸다. 내가 심었던 씨앗들, 우리 둘이 애써 가꿔온 작물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재가 날려 내 마스크를 덮었다. 냄새도, 색깔도 잃어버린 그 땅 위에,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제 끝이야, 주단."
제로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스쳤다. 그도 더는 이곳에 희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둘 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무게가 내 어깨에 더 크게 느껴졌다. 끝이라니. 정말로 이게 끝일까?
나는 눈앞의 폐허를 바라봤다. 한때 이곳은 작은 희망이었다. 이 척박한 지구에서 다시 생명을 피워낼 수 있다는 믿음. 매일 새벽이 오기 전에 은이와 나는 이곳에 와서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바람이 불어 닥칠 때마다 작물들을 지키려고 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불타고, 부서지고, 잿더미만 남았다.
"주단, 떠나자."
제로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피곤과 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둘 다 너무 오래 버텼다. 이제 더는 버틸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래도 가족들에게 메시지는 남겨야겠지?'
<농장이 불타버렸어요 할머니. 돈은 어떻게 해서든 곧 마련해 오겠습니다!>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더 이상 여기서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버티는 건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화성으로 가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었지만, 이곳에서 더 머무는 것도 답이 아니었다.
나는 제로와 함께 서둘러 짐을 꾸렸다. 남은 물과 씨앗 몇 개, 그리고 조금 남은 식량. 이게 다였다. 더는 들고 갈 것도, 남아 있는 것도 없었다. 내 손끝에서 잔뜩 쥔 재가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 우리 삶도 이 재처럼 부서져 버린 것 같았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온실을 돌아봤다. 그동안 우리가 흘린 땀과 시간이 여기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폐허다. 우리가 사랑했던 지구도, 꿈꿨던 미래도 전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더는 눈에 담지 않으려는 듯이. 이제 떠나야 한다.
우린 떠났다. 아무 말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이상 남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재로 덮인 농장도, 우리 손으로 복구한 온실도 이제는 모두 과거였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짐을 짊어지고 걷기 시작했다. 갈 곳은 없었지만, 어딘가에 닿기를 바라며 무작정 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리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나는 제로를 슬쩍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고, 눈은 퀭했다. 그도 그럴 것이, 먹을 것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남아 있던 비상식량은 이미 며칠 전에 다 떨어졌다. 우리는 이제 남은 씨앗 몇 개와 물 조금으로 버티고 있었다.
"주단…"
제로가 힘없이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에 스치는 마른 풀잎처럼 가늘고 희미했다.
"이러다 우린…"
나는 그의 말을 듣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걷다가는 결국 굶어 죽을 거라는 걸. 하지만 멈추면 그마저도 불가능해질 것 같았다. 우리는 이 황폐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무언가 있을 거야."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말이었지만, 제로는 더 이상 그 말에 희망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눈빛 속에는 더 이상 기대나 꿈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하루 종일 먹지 못한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나 역시 속이 쓰리고 어지러웠다. 발밑의 흙이 무겁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건 곧 죽음이었다. 우리는 지구가 우리를 버렸듯, 우리도 이곳에서 버림받는 운명이었다.
"주단… 진짜 이대로 가다가… 우린 끝이야."
제로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내 배낭을 풀고 마지막 남은 씨앗들을 꺼냈다. 그것들을 손에 쥐고 잠시 바라보다가,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는 살아남지 못해."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린 마지막까지 뭔가 남겼어. 그게 다야."
제로는 씨앗을 보더니,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모든 게 끝나가는 듯한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를 지켜보며 함께 버티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몸은 무거웠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굶주림과 피로가 계속해서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로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땅은 끝이 보이지 않는 척박함만을 보여주었고, 머릿속에는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발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것이 단순한 신기루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질수록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마을이었다. 아니, 최소한 마을이었던 곳. 폐허가 된 건물들이 여러 채 흩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생명의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구원의 빛을 본 것 같았다.
"저기… 뭐가 있어."
나는 제로에게 손을 들어 가리켰다. 그도 눈을 크게 뜨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그곳에 우리가 찾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의 눈에 스쳤다.
"가보자, 주단."
그가 힘없이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대답할 힘조차 없었지만,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을은 오래전부터 버려진 듯했다. 건물들은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고, 창문은 깨져 있었다. 길거리는 고요했고, 먼지와 바람만이 이곳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것은 그 건물들 뒤편에 있는 작은 창고였다. 문이 반쯤 열린 채로 덩그러니 서 있는 그곳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에겐 무언가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