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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Nov 04. 2021

늙어간다는 느낌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85년생, 올해 37살이다. 아직까지는 내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 나 어릴 적에 비하면 결혼을 하는 시기도 한참 늦어지고, 평균수명도 길어져 그런지 몰라도 체감상 20-30년 전의 30대 후반보단 훨씬 젊게 산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누가 보면 영락없는 아줌마, 애 엄마긴 하겠지만 스스로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 나도 늙긴 늙고 있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다.


늘어나는 뱃살이나 주름살을 보며 그럴 때도 있지만, 핸드폰 속 글씨 크기가 어느 날엔가 유난히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진 것이다. 아직 새치머리 하나 없는데,  노안부터 온 것인가! 10여 년 전 라섹수술을 하여 빛나는 의술의 혜택을 누려왔건만, 어른들이 말하는 '눈이 침침하다'는 표현의 '침침하다'란 대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질 않았는데.. 그게 뭔지 정확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원시가 와서 가까운 거리의 무언가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핸드폰 화면 밝기를 한 단계, 두 단계 정도 낮춘 느낌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아주 앙증맞은 수준의 우울감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담담하게 핸드폰 화면을 좀 더 밝게 하고, 가장 작게 설정되어 있던 글씨 크기를 두 단계 더 크게 바꾸었다.


부모님 나이뻘 되는 어르신들의 핸드폰 화면을 보면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이시므로 글씨가 엄청 크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번에 두어 단계 더 글씨 크기를 크게 조정할 때 즈음엔 난 얼마나 더 늙어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서 늙어간다는 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던 일들이 하나, 둘 하기 힘들어지는 과정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눈은 점점 더 침침해질 것이고, 귀도 어두워질 것이다. 긴 시간 산책하거나 서 있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들이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서서히 나도 모르는 새 일어날 그런 과정들은 내 삶이 죽음에 조금씩 다가간다는 느낌을 주며 나를 슬프게 만들 것이다.


 어차피 모든 생명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지만, 내 아름다웠던 젊음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청춘도 조금씩 저물어간다는 그 사실을, 문득 가을의 한가운데서 느끼게 되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나는 점점 더 나이 들어가겠지만, 콩나물처럼 쑥쑥 크는 딸을 보며 행복하기도 하다. 나중에 더 늙어서 요 귀여운 것한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살고 또 무엇보다 건강해야겠지 하고 다짐했다. 내 청춘은 저물고 있지만, 활짝 피어날 내 아이의 청춘을 지켜보는 새로운 재미도 있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만약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삶에 큰 걱정거리 하나는 줄었겠지만 인생이 왠지 좀 더 빨리 시들해졌을 것만 같다.


기승전육아인가 이야기가 왜 또 아이 얘기로 가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ㅎㅎ 아무튼 건강하게, 잘 늙어가고 싶다. 올 한 해도 훌쩍 지나가버려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사 문제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부디 잘 해결되어 무사히 이사하고, 올해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 결혼 후 벌써 네 번째 이사인가. 새로운 곳에서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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