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견딜 수 없는 날이 있다.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해왔던 일들에 숨이 막혀 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다. 타인이 나에게 하는 말이 비수처럼 찔려 오고 내게도 가시만 돋아나는 때. 입꼬리 하나 올리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도무지 다음 일정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나는 풀숲을 걸었다. 어린이대공원으로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갔다.
더운 여름날의 열기가 가신 시각. 맨발로 흙을 밟고 잔디 위를 걸었다. 이전에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걷고 방랑자처럼 정처 없이 잔디 위를 걸었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발견했다. 이전에도 그 길을 여러 번 지나쳤는데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장소였다. 놀이터 한쪽에 두꺼운 밧줄을 엮은 해먹이 보였다. 그 위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본 일이 얼마만일까.
밧줄에서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냄새가 났다. 아이들이 오르락내리락했을 해먹은 꽤 단단했다. 단단해 흔들리지 않는 해먹 위에 누워 팔과 다리를 늘어뜨렸다. 고르게 숨을 내쉬고 해야 하는 생각을 몰아냈다.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 시각, 저녁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 내리쬐던 한낮의 태양도 어딘가로 가버렸고 적게 남은 햇빛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 속에 누워본 일이 있던가. 이토록 깊숙이 들어와 그 사이에 늘어져 본 것이.
잔디 위를 걸으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명이 태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툭툭 날아오르는 날개 달린 것들. 줄지어 지나가는 개미들, 잔디 사이를 나부끼는 나비.
가만히 누워 있으니 윙윙 거리며 귓가에 맴돌고 짹 거리던가 찍 거리던가 우웅 거리던가 각종 새가 지저귀고 울어댔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제 목소리를 냈다.
저 하늘에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을 눈으로 좇으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생명이 들끓는다는 표현을 이제야 조금 알겠다. 죽어 있는 것만 같은 삶에도 이토록 수많은 생명이 태동하고 있을 줄이야. 나는 참으로 아둔했다.
나를 내쫓아내듯 그렇게 바글거리는 생명력, 그것에는 정말 힘이 있다, 그저 버티고 숨쉬기만 하는 게 아닌 진짜 힘.
나도 살아 숨 쉬고 싶다. 원하는 것을 말하고 표현하고 소리치고 싶다. 그제야 입을 열어 말할 힘이 났다.
“사실은 힘들다.”
내가 말하지 못한 말. 남들에게 판단받을까 두려워 삼키고 자기 검열 속에 끝내 내뱉지 못한 나의 감정들이 내 안에 바글바글했다. 그 말이 섞여 ‘힘들다.’라는 말로 나왔다.
끊임없이 소리치는 이 동력은 말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 소리를 낸다. 나는 소리 내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이젠 정말 가야 할 때였다. 제자리를 빙빙 도는 이 향방 없는, 끓어오르는 생명에서 벗어나 다시 규칙과 규율과 책임 가운데로 나아간다.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책임져야 할 것들과 해야 할 일들을 하러 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무겁지만 이전보단 훨씬 가벼운 걸음으로.
사실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