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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Aug 21. 2021

미래를 여는 퀴어 수치심

E. M. 포스터 《모리스》(1971), 영화 〈모리스〉(1987)

  E. M. 포스터가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사후에 출간한 소설 《모리스》는 세 남자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클라이브 더럼은 정신적 사랑만을 갈구하는 상류층 출신 엘리트주의자고, 알렉 스커더는 육체의 끌림과 내면의 목소리에 솔직한 노동계급 청년이다. 주인공 모리스 홀은 클라이브에게서 삶의 충일함에 의한 만족을 얻지 못하나 그로 인한 결핍을 스커더와의 만남으로 해소하는 인물이다.


  E. M. 포스터는 계급을 넘나들며 온전한 동성애자로의 삶을 갈구했던 모리스가 겪었던 혼란의 흔적을 섬세한 필치로 기록했다. 한 명의 퀴어 독자로서, 《모리스》를 읽으며 가장 몰입하게 되는 순간들 역시 이런 장면들이었다. 모리스가 겪는 어둠, 오류, 격렬한 분노, 두려움, 열망, 언짢음, 혐오, 욕망, 질투, 굴욕감, 외로움, 균열, 치욕, 방황….


  물론, 퀴어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같은 감정이라도 그 감정이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봐야 한다. 어떤 경험이 그 감정을 촉발했는지에 따라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모리스》의 세 인물을 살펴보자.


클라이브 더럼과 모리스 홀. 영화 〈모리스〉 스틸컷. 


  첫 번째는 모리스의 어릴 적 선생님 듀시다. 듀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모리스에게 성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줘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어머니와 여동생들밖에 남지 않은 모리스에게 ‘남자 역할’을 가르쳐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듀시는 바닷가에 나무 막대로 그림을 그려가며 모리스에게 성의 원리를 설명해 준다. 듀시는 모리스에게 베푼 호의에 스스로 매우 뿌듯해한다. 제대로 된 ‘어른’ 역할을 한 것만 같아서다.


  그런데 그때 바닷가에 귀부인이 포함된 사람들 무리가 나타난다. 듀시는 화들짝 놀란다. 모리스가 밀물에 그림이 지워졌을 거라고 말해 준 후에야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마 그들이 듀시의 그림을 봤다면, 듀시는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정숙한 시민의 도덕과 듀시가 그린 그림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듀시를 본 모리스는 그가 거짓말쟁이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자애로운 척 알려 준 내용들이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 말은 결코 진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작 수치심을 느껴야 할 거짓말 대신, 음란한 그림에만 신경을 쓰는 듀시는 얄팍한 도덕의 소유자일 뿐이다.


  두 번째는 클라이브의 어머니가 느끼는 수치심이다. 클라이브는 새로운 시대의 엘리트답게 신을 믿지 않는다. 클라이브가 크리스마스 성찬례마저 거부하자 어머니가 깜짝 놀란다. “온 마을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클라이브 없이 딸들만 데리고 긴 발판 한복판에 무릎을 꿇을 생각을 하니 부인의 가슴은 수치심이 찢어졌고 분노로 불타올랐다.” 마을의 유일한 신사 계급으로서 클라이브의 어머니는 위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클라이브가 성찬례를 거부하면 신사 계급의 명예가 더럽혀진다. 클라이브의 어머니가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는 건 이 때문이다. 듀시의 수치심이 도덕과 관련이 있다면, 그녀의 수치심은 신분과 관련이 있다.


  마지막은 주인공 모리스의 수치심이다. 모리스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 생각하자 … 무거운 수치심”을 느낀다. 클라이브에게 실연당한 후 외로워하던 그에게 추근대며 다가온 늙은 사내를 두들겨 팬 후에는 그 “역겹고 추악한 늙은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수치심을 느낀다. 두 명의 의사 앞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고 치료해 달라고 애걸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그 역시 중산층의 일원이지만, 사회가 중산층 이성애자들을 “너무도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이 그 행복에서 배제되었다는 데 수치심을 느낀다. 즉, 모리스는 자신이 사회로부터, 행복의 전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에 수치심을 느낀다.


알렉 스커더와 모리스 홀. 영화 〈모리스〉 스틸컷.


  이처럼 누군가가 느끼는 수치심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기득권인지 소외된 사람인지, 사회질서에 포함된 사람인지 배제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각기 다른 수치심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다.


  다른 건 수치심의 계기만이 아니다. 모리스의 수치심은 알렉과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전개시키는 계기가 된다. 몇 번의 엇갈림 끝에야 알렉의 마음을 확인한 모리스는 “자신의 치욕을 통해 알렉의 치욕을 이해한 것”에 기쁨을 느낀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모리스는 자신과 알렉이 같은 수치심을 품었음을 인식함으로써 사랑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수치심을 느꼈던 듀시와 클라이브의 어머니와 달리, 모리스는 수치심을 통해 사랑을 쟁취한다. 여기서 수치심에 관한 두 번째 명제가 나온다. 우리가 느끼는 수치심은 우리가 어떤 사람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모리스》를 읽다 보면, 퀴어들이 언제 어디서나 ‘같은 것’, 즉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에 울적해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의 '공통적인 것'으로 여겨져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젖힘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이 깃든 것일 테다.


  이제 남는 질문은 이렇다. 당신은 어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수치심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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