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김동인 단편선-감자》(문학과지성사, 2004)
수록작 <발가락이 닮았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출처는 아라비안나이트다. 병 안에 갇힌 마신이 있었다. 마신은 간절히 빌었다. 백 년 안에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면 그에게 거대한 부를 주겠다고. 하지만 아무도 병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신은 또 한 번 다짐했다. 그다음 백 년 안에 나를 구해주는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보배를 주겠다고. 또 백 년이 지났지만 마신은 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마신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 백 년 안에 병에서 자신을 꺼내 주는 자에게 가장 큰 권세와 영화를 주겠다고. 또다시 100년이 지났고, 마신의 기다림은 헛되이 소멸했다. 마신은 마지막 맹세를 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면, 그 자를 당장 죽여 그동안의 울분을 풀겠다고.
마신의 이야기는 김동인 소설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김동인은 운명 앞의 개인이란 문제에 천착했다. 운명은 부조리하며 가혹하다. 그래서 개인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거나 무너져 내린다. 분노로 파멸하거나 극도로 무기력해진다. 작가는 이 과정을 밀도 높게 형상화해낸다. 결과만 놓고 보면 혀를 차거나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행위들이 부조리한 운명 앞의 '필연적' 귀결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운명을 개척하고 삶을 끌어올리기 위해 간절히 노력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이들은 자꾸 미끄러진다. '건전한' 도덕과 장기적 관점은 당장의 고난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윤리는 축소되고 이성은 마비된다. 비합리적인 결정이 축적되고, 삶은 거칠어진다. 감정은 광폭해지거나 축 가라앉는다. 삶의 의지와 윤리는 쪼그라든다.
개인의 괴로움은 이 과정의 슬픔을 극대화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추락'을 감각할 수 있는 근대적 개인이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꾸라지지 않는다. 자기 삶의 가능성이 쪼그라드는 매 순간마다 그들은 자책하며 고뇌한다. 하지만 부조리하며 가혹한 운명은 자비를 모르며, 괴로워하는 개인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기력과 파멸만이 남는다.
'운명 앞에 끙끙대지만 자꾸만 가라앉는 개인'이라는 주제는 김동인의 시대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서 김동인의 '현대성'을 찾았다. 나 또한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