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만 그래?
"그걸 왜 버려? 냅둬! 다 쓸 일이 있어!"
우리 집에서 뭔가를 버릴 때는 항상 아빠 눈치를 보고 버려야 한다.
아빠가 있을 때 뭔가를 버리면, 득달같이 달려 나오셔서 "이걸 왜 버려!" 하고 물건을 버리지 못하게 하신다. 그래서 낡은 책장을 버리거나, 고장 난 의자 등 물건을 버려야 할 때는 아빠가 늦게 오시는 날 해치운다.
아빠는 왜 물건을 버리지 못하게 하실까?
가장 최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릴 때 산 책장/책상/서랍 세트를 근 17년 가까이 사용하자, 책장 뒤판이 떨어지고, 칸막이가 무너지는 등 조만간 무너질 것 같은 상태가 됐다. 이제는 버려야겠다 생각이 들어 정리를 시작했다.
짐 정리를 하던 중 옛날에 내가 썼던 삼보 컴퓨터 모니터가 나왔다. 초등학교 때 샀던 2003년식 모델인데 버리기가 귀찮아서 그동안 서랍 칸에 짱박아 두었던 모니터였다. 정말 생긴 것도 예스럽게 정사각형 액정이었다. 짐 정리를 다 하고 모니터는 나갈 때 버리기 위해 현관문 앞에 두었다.
"이거 뭐야? 버리는 거야?"
실수였다. 그날 밤 아빠가 들어오시면서 내가 현관문에다 둔 모니터를 보신 것이다.
"아... 그거 책상 정리하면서 나온 건데... 너무 옛날 거라 이제 버려야 해요..."
혹시나 아빠가 그 옛날 모니터에 눈독을 들이실까 봐 애초에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해드렸다. 하지만 이미 아빠는 그 모니터에 관심을 뺏긴 채, 내 얘기를 듣지 않으셨다.
"이거... 아빠가 쓰면 될 것 같은데?"
"아빠 그거 2003년식,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 모니터예요... 그냥 버리고 오히려 새로 사는 게 더 돈 돼요. 쓰다가 고치는 비용이 더 들 거예요"
"아빠는 컴퓨터를 많이 안 쓰잖아. 이 정도도 괜찮아"
"아빠 이미 사무실에서 다른 모니터 쓰잖아요. 굳이 이걸 쓸 일이 뭐 있겠어요"
"그래도 집에서 쓰거나 회사에 두고 급할 때 쓰면 되잖아"
"아빠... 이거 잭도 옛날 모델이라 요즘 컴퓨터랑 호환이 안돼요. 요즘 컴퓨터에는 이런 선을 꽂을 곳이 없어요"
"음... 그러면 인터넷에 변환 잭 팔지 않나?"
"아빠... 요새 요새 10만 원 대면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모니터 살 수 있어요... 왜 굳이 20년 된 나쁜 모니터를 일부러 써요..."
"그래도..."
아빠와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거실에서 이 모든 상황을 듣고 있던 엄마의 큰소리로 마무리됐다.
"그럴 거면 그냥 고물상 가서 다 주워와!!!!"
아빠는 그제야 포기를 하고 집에 들어와 저녁을 드셨다.
하지만 이런 아빠의 습관이 한 번 빛을 발한 적이 있다.
작년 우리 집은 누전으로 인해 집안의 모든 전등을 쓰지 못한 적이 있다. 다행히 콘센트는 사용할 수 있어서 스탠드나 램프는 쓸 수 있었다.
그때 아빠는 모아뒀던 스탠드와 램프를 안방에서 갖고 나와 집안 곳곳에 꼽아두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다행히 그날 밤을 암흑으로 보내지 않아도 됐다.
"봐봐! 다 아빠가 다 쓸 일이 있다고 했지?"
근래에 봤던 아빠의 가장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아빠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아빠 일상생활의 취미(?) 때문이기도 하다. 아빠의 취미는 '고치기'다. 집에 부러진 의자나 깨진 물건들이 있으면 하루 종일 붙잡고 고치신다.
아빠가 혹시 기술자인가 물어볼 수 도있는데... 아빠의 직업은 그것과 거리가 먼 일반인이다. 그래서 고치셨다고 해도 사실 실리콘으로 때우거나 강력 접착제를 바른 게 대부분이라, 곧 다시 고장 난다. 하지만 그래도 아빠는 수리를 멈추지 않는다.
만약 아빠 몰래 고장 난 물건을 버리고 나중에 아빠한테 들키면,
"아빠한테 얘기하면 다 고칠 수 있는데 왜 얘기들을 안 하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빠는 서운한 티를 내신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우리 집은 아빠가 잘 못 고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이처럼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아빠는 종종 엄마에게 큰 소리를 듣게 된다.
"그걸 도대체 왜 안 버리냐니까! 이러다가 집안 고물상 되겄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다 쓸모가 있다니까!"
하시면서, 여전히 팽팽히 맞서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