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된 아파트와 동고동락하기
“누가 여기다가 커피 흘렸어!”
아침부터 엄마의 큰 소리가 들렸다.
“왜? 무슨 일인데?”
“아니, 여기 커피포트 옆에 커피 물이 흥건하잖아! 누가 그랬어! 너야?”
“나 아니야. 내가 왜 커피를 일부러 이렇게 흘려”
“그럼 누구야! 아빠야?”
“나야 모르지. 이따 아빠 오면 물어봐”
엄마는 누군가 사고를 쳐놓고 도망간 현장 앞에서 분노하고 있었다. 아빠가 그랬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이따 들어오기만 해 봐라”라고 계속 말하면서 싱크대를 신경질적으로 닦으셨다.
그런데, 몇 분 후 엄마는 아까와 다르게 침착하게 나를 불렀다.
“xx아, 이리 좀 나와봐!”
“왜 또 그래”
“이거 커피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커피라고 하기에는 색이 조금 연했다. 그리고 냄새도 커피 냄새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싱크대가 흥건할 정도로 커피가 고여있었으면, 그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나야 하는데,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때 엄마가 천장을 가리켰다.
“누수다…”
엄마가 가리킨 곳에서는 벽지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옛날 무한도전에서 물 새는 정형돈네 집을 놀리려고, 멤버들이 “집 샌~ 물 샌~”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때는 깔깔 웃으면서 봤는데, 지금은 ‘우리 집이 집 샌 물 샌 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사실 우리 집은 벌써 완공된 지 30년이 넘었다. 신도시 개발사업 당시에 지어진 아파트인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 그래서 그런지 크고 작은 잔고장이 많이 난다. 노후 수도관 교체 공사를 할 때, 초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한 적도 있었고, 한 여름에 모든 세대가 에어컨을 돌리다 정전이 온 적도 있었다.
잔고장 중에서도 누전, 누수 고장이 제일 많다. 특히 누수가 골치 아프다. 누전은 그 세대만 고치면 되지만, 누수는 그 세대와 아래 세대 모두 고통을 받는다. 또 누수가 나면 누전도 같이 올 때가 많다.
우리 집은 이미 몇 차례 누수를 경험했다. 심지어 올해 초에 또 누수가 나서 공사를 했었다. 주로 수도 파이프 라인이 노후화돼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위 아랫집이 모두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우리 집은 화재보험에 가입돼 있어서 큰돈 쓰지 않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누수는 윗집에서 발생했다. 엄마가 윗집으로 올라가 “누수인 것 같다”라고 얘기하자, 윗집 아줌마가 급히 내려와 우리 집 벽을 확인하시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누수야? 작년에도 누수 때문에 공사했는데…”
“그러니까… 근데 아파트가 노후돼서 우리말고도 여기저기 다 터진데”
엄마와 윗집 아줌마는 답답한 마음에 넋두리를 하셨다. 윗집 아줌마도 벌써 여기에 20년 이상 사시는 분이라 누수에 때문에 엄마와 동병상련하셨다.
이후 윗집 아줌마는 사람을 불러 다시 누수 공사를 시작하셨고, 지금은 말끔히 고쳐진 상태다.
예전에 복지관에서 공익 근무를 할 때, 노인정 보일러가 고장 난 적이 있었다. 그 건물도 노후 건물이라 여기저기 말썽이 많았다. 그날은 도저히 노인정을 운영하기 힘들어 어르신들에게 사정을 말하니, 한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도 늙으면 여기저기가 고장 나는데 기계라고 멀쩡하겠어? 얘네도 풍도 맞고, 치매도 걸리고, 암도 걸리는고 하는 거지 뭐. 풍 맞았다고 생각하고 오늘은 저기 건너편으로 가야겠구먼”
아무 감정 없이 던지시는 말이었지만, 위트 있는 그 말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할머니 말처럼 우리 집도 늙으니까 이제 여기저기 아파하는 것 같다. 사람도 일 년에 한두 군데 아픈 게 아닌데, 얘네들은 오죽하겠나. 집도 늙어서 많이 아프다고 생각하고 수리해서 또 살아야지.
그렇게 오늘도 30년 된 아파트와 동고동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