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의 숨겨진 기능
“덥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다.
체감온도가 30도를 훌쩍 넘고, 유리창과 바닥은 뜨겁게 달궈진다. 정오가 넘은 오후부터 저녁 사이 공기의 온도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다. 심지어 곧 열 돔 현상이 시작되어, 지금보다 더 심한 무더위가 찾아올 것이라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에어컨이다. 웬만하면 에어컨을 틀지 않는 우리 집도 이맘때쯤에는 항상 에어컨을 틀고 지낸다.
그런데 에어컨을 틀다 보니, 냉방 기능 말고 다른 기능을 발견하게 됐다. 그건 ‘가족모임’ 기능이다.
보통 집에 있을 때, 나는 내 방에, 엄마는 거실에, 아빠는 안방에 계신다. 그런데 에어컨을 틀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들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최대한 시원한 곳에 앉으려고 다들 에어컨 바로 아래에 모여든다.
내가 아마 고등학생 때부터, 우리 가족은 집에 오면 각자의 공간에서 지냈다. 각자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함께 모여있는 시간보다, 각자의 방에서 일과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이 거실에 다 같이 모일 때는 보통 가족 행사가 있을 때였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집안에서 함께 모여있던 적은 없었다. 나는 대부분 밖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아빠는 사무실에서, 엄마는 가게에서, 누나는 회사에서. 다들 집에 돌아와서도 피곤에 지쳐 침대 위로 몸을 뉘었지, 거실에 함께 모여 뭔가를 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런데 여름 이맘때만 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무더위에 지쳐 다들 거실 에어컨 아래로 모여들었다. 열대야에 힘들어 에어컨을 켜면 엄마는 자연스럽게 과일을 깎아오신다. 그러면 과일을 하나씩 먹으면서 그날 있었던 일, 앞으로 있을 가족 행사, 서로 싫어하는 사람 뒷담화 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 시기가 이번에도 돌아왔다. 전과는 다른 점은 이제 내가 가족들과 모이는 것을 썩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모이는 것을 많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함께 모이는 것을 꽤 귀찮아했다. 그런데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있을 때 부모님께 잘해드려라’라는 말이 와닿았다. 항상 함께하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젠가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다. 그래서 요새는 웬만하면 가족 모임에 자주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부모님도 옛날 분들이라 함께 모일 때는 술을 먹거나 인위적인 상황이 필요했는데, 에어컨을 킬 때는 그런 특별한 노력 없이 같이 있을 수 있어서 편하다.
여름의 무더위는 정말 싫지만, 가족과 함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노가리(?)를 까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