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린그림 Nov 12. 2024

2. 천일화

낱말 도깨비2

 계절마다 한 번은 저녁 내내 당직근무를 선다. 야간 당직을 설 때 쓰는 1층 예금 창구 책상엔 누가 가져다 뒀을지 모를 묘한 물건이 있다. ‘프리저브드 플라워’라는 것인데,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물건은 보존을 목적으로 유리돔 안에 장미 생화를 넣어둔 것이다. 꽃이 시들지 않고 오래간다고 하여 '천일화'라고도 불린다. 예쁘고 신기했다. 장미의 색 진한 꽃잎은 산뜻했고, 유리돔 역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할만하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톺아볼수록 그건 다소 잔인한 물건이었다. 흠 하나 없는 아름다운 장미만을 고르고 고른다. 그렇게 고른 장미를 대가리만 슥삭 잘라서 공기 하나 안 통하는 유리돔 안에 꽁꽁 가둬놓는다. 이 잔인함을 무어라 이해해야 할까. 장미의 아름다움은 사랑하지만, 그가 그의 방식대로 잔잔히 시듦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일까.

천일화는 직관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장미의 이데아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보는 이의 얕은 앎으로 규정한 이데아일 뿐이다. 일 년의 많은 날 중 장미가 꽃가루받이를 위해 개화하는 기간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인 우리가 떠올리는 만개한 장미는 그에게는 그저 결혼식의 예복과 같은 것이니, 그 한순간만을 고정하여 가둬둔 천일화는 보는 이의 교만이요 상상력의 빈곤함이다. 유리돔 속에 장미를 꽁꽁 가둬둔다고 해서 온전히 그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를 감싼 매끈한 유리막이 야속했다.


 이런 유리돔이 꽃에만 씌워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몇 해 전의 일이다. 구직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롭던 시절에 우연한 기회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성과 한동안 연락을 하게 됐다. 그는 대형 캐피탈사에 근무하는 직장인이었는데, 20대 애송이 취준생이었던 내가 볼 땐 참 멋져 보였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꽤 예전 20대 초중반 시절의 사진으로 해두셨던 이 분은 대화 중간마다 다소 맥락 없이 예전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예뻤는지, 어떤 색으로 머리에 물을 들였는지, 어떻게 입고 다녔는지. 내가 생각할 때 그런 과거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내 앞에 선 사람은 과거의 그가 아닌 여기, 지금의 그였으니. 몇 살이나 어린 남자와 대화를 하려니 겸연쩍어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신에겐 20대 중반의 그 시절이 스스로 생각하는 여자로서의 이데아였을 수도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자신에게 유리돔을 씌운 셈이다.


 비록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아 격절한 그가 스스로를 그 유리돔에서 구해냈을지 어떨지 지금에 와선 알 길이 없으나, 이것이 그만의 모습은 아닌 듯하다. 한동안 내가 추구한 천일화는 취업이었다. 나는 '좋은 직장에 취직한 나'를 꿈꾸며 그 모습을 유리돔에 담아내길 갈망했다. 막연히 취업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어떤 어려움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처럼 생각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런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취업은 삶의 종착점이 아니었으며 세상 사는 일은 다시금 새로운 어려움을 가져왔고, 해가 갈수록 그 무게가 늘어가는 숙제가 되어 여전히 나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그 압박 아래에서 아등바등 삶에 씌울 또 다른 유리돔을 찾는 나를 본다. 만약 정말 사랑하는 이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다면- 혹은 이직에 성공해서 늘 원하던 직장에서 원하던 일을 하게 된다면- 하는 기대들이다. 이런 것은 그나마 양반이다. 나는 심지어 취업 전의 나를 그리워하고 이를 주워 담아 다시 유리돔에 넣으려고 할 때도 있다. 그때는 더 많은 선택과 기회가 있지 않았나 미화하며. 아찔한 어리석음이다. 이런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나는 무척이나 지치는 기분이 들어 앞길이 아득하게 느껴지곤 한다.


 이렇듯 우리는 참 다양한 것들에 유리돔을 씌우곤 한다. 젊음, 아름다움, 건강, 인연, 사랑, 꿈, 그 외 수많은 것들. 이것들의 목록을 나열하기엔 끝이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생을 바쳐 추구하는 천일화고 이데아다. 가진 것이라 사랑의 대상이요, 갖지 못하여 갈망의 대상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 기다림의 대상이요, 지나간 것이라 회한의 대상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갈망하고 기다리고 그리워하는지와 상관없이 적용되는 참으로 무정한 법칙이 있으니, 가령 이런 것이다.

'이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다. 없어지기 마련이다. 변하기 마련이다.'

 이는 어느 수행자의 유언에서 따온 말이다. 시간 지나도 늙지 않고 건강한 자 없고, 이별 없는 인연과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은 무조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설령 성취되더라도 삶의 종착점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미래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며 과거는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다. 유리돔 속 장미가 장미의 이데아가 아니듯이, 우리가 유리돔 씌우려는 많은 것 중 어느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이데아가 되어주지 못한다. 삶에 대한 영원불변한 이데아라는 것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유리돔 안에 고이 간직해야 삶의 본질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 삶의 가장 좋은 부분, 꽃의 대가리만을 잘라 간직하고 싶은 우리의 못난 마음과 달리, 삶은 곰비임비 쌓인 전부 아닌 것들이 모여 전부가 되는 것이니. 그래서 유리돔 속에 갇힌 삶은 언제나 파편에 그칠 뿐이며 천일화 같은 삶은 가장 허황된 전설이다. 삶은 한 세월 한 세월 쌓여가는 시간과 사건의 지층으로, 그 안에는 피할 수 없는 상실과 실패, 패배가 가득하다. 우리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도 멈춰주지도 않는 삶이란 그리도 무정한 것이다.

 장광설로 풀어놓은 이 이야기는 실은 뻔한 이야기로, 당신도 어디선가 들어봤고 알고 있을, 삶의 무정함에 대한 여느 일반론 중 하나이다. 삶이 무정함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기대감으로 유리돔을 씌우고, 그것이 끝내 깨지는 것을 보고, 그 파편 위에 앉아 애통해함을 반복하는 일을 우린 삶이라고 칭한다. 유리돔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사람으로 태어나며 받은 천형일까? 떠나보낸 것들에 대한 유정함과 채우지 못한 갈망 앞에 너무 오래 흔들리는 자신을 보면, 초연한 삶이라는 것은, 마음의 굳은살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삶의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런 모든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믿는다. 예컨대 나는 살면서 겪는 수많은 상실을 피해 갈 수는 없으나 그 앞에서 무너지는 대신 그때까지나마 나의 것이 되어줬음에 감사하며 내려놓기를 결심할 수 있다. 또 나는 과거를 돌이킬 수도, 미래를 온전히 결정할 수도 없겠으나,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는 대신 지금 그리고 여기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망하는 바를 이뤄내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여전히 좌절하길 거부하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노력했음에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실패와 패배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편이 되어 그를 안아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소유와 결과가 아니라 태도와 과정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그러니 인생 앞에서 너무 주눅 들 필요는 없겠다. 세상은 앞으로도 사정없이 내 뺨을 후려치겠으나, 그럼에도 고개 뻣뻣이 들고 노려보는 씩씩함만 남아있으면 삶은 온전히 내 손아귀 속에 지켜질 것이다. 쉽진 않겠으나, 모가지에 그 정도 버틸 힘은 남겨놓고 살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천일화 같은 무리한 욕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만 남아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나는 한사코 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억센 마음으로 유리돔 깨부수고 온전히 살아갈 것이다. 굴레처럼 죄어드는 삶의 무정함 모조리 고개 저어 쳐내고, 다난한 생의 길 다시 한번 천리마처럼 내달리고 싶다. 벌써 지치기엔 아직 남은 시간이 너무나 길고 또 소중하다.


[+] 도깨비주머니

- 톺아보다 : 샅샅이 톺아 나가면서 살피다.

- 이데아 :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얻어지는 최고 개념. 플라톤에게서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를 뜻한다

- 꽃가루받이: 종자식물에서 수술의 화분(花粉)이 암술머리에 옮겨 붙는 일. 바람, 곤충, 새, 또는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 겸연쩍다 : 쑥스럽거나 미안하여 어색하다.

- 격절하다 : 서로 사이가 떨어져서 연락이 끊어지다.

- 아득하다 :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희미하고 매우 멀다.

- 아등바등 : 무엇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우겨 대다.

- 곰비임비 :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계속 일어남을 나타내는 말.

- 장광설 :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

- 천형 : 하늘이 내리는 큰 벌.

- 유정하다 : 인정이나 동정심이 있다.

- 초연하다 : 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다.

- 한사코 : 죽기로 기를 쓰고.

- 죄어들다 : 안으로 바싹 죄어 오그라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