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하늘로 떠나 보낸 어른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최근 함께 살던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남겨진 75세 된 어른 한 분을 오늘 만났다.
그분의 상실을 감히 알 수 없어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냥 미소를 지으면 평소 하던 대로 인사만 건넨다.
그리고 수분이 흘러 수없이 많이 들었을 법한 말 한마디를 건 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일까? 아랫사람에 대한 웃어른의 채면 같은 모습 때문일까? 조용하고 점잖은 모습도 시크하게 넘어가시려는 모습에 나의 마음 한켠이 더 시려왔다.
내가 그 마음을 알 수나 있을까?
늘 함께 했던 배우자를 잃어버린 자 만이 상실감에 슬픔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유추할 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고 그저 바라만 보았던 것이다.
그러다 한마디 건네 신다. “다 가는 걸 뭐, 가야지 가야 할 곳이니까”
어릴 때는 죽음이라는 것에 공포감이 있었다. 특히나 동네에 상을 당하면 상을 치르는 3일 내내 그 집의 불은 환하게 밝았고, 곡소리와 사람들의 소리들로 가득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집 앞을 언제까지고 지나치기 힘들어했었다. 다름 아닌 “무서워서” 그 어른의 평소 모습이 떠올랐고, 어떤 분은 나와 친밀히 이야기도 나누었던 동네 어르신들이신데 소위 죽었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이웃과 사회관계망이라는 범위가 확장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빈소에 조문을 하는 일도 잦아졌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무디어 졌다고 할까? 더 이상 어릴 때처럼 무섭지 않다.
그리고 그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며서 아파하기도 하고, 어제까지만 도 대화하던 이웃들이 떠났다는 소식에 놀라고 허무한 상실감에 한동안 괴로워하기도 하다가, 조금 더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나 역시 아까 말씀하시던 그 어른의 말씀이 공감이 되는 것이다. “다 가는 걸 뭐, 가야지 가야 할 곳이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면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나는 평생을 나와 함께 사는 줄 알았다. 누구나 죽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나의 부모 같은 두 분은 제외였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100세가 되어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할아버지와 이미 작별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나와 함께한 추억이 너무 많아 아픔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 나눈 내 몸과 같은 할아버지를 보내며 그렇게 눈물이 났었다.
그런 눈물을 한방에 싹 마르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내 아빠였다.
나의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한동안 울 수 있도록 지켜보시던 아빠는 한 마디를 하셨다. “그만 울어라. 사실만큼 사셨다 가실 곳에 가신 거지.. 200살 드셔봐라 그때도 서운하지 않겠냐?”라는 그 말에 신기하게도 눈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 말은 곧 나도 아빠도 할아버지도 인정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까 그 배우자를 떠나보낸 어른의 말씀처럼 “다 가는 걸 뭐, 가야지 가야 할 곳이니까” 그 말을 알겠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부모야 그랬지만 배우자는 또 다른 느낌의 상실감 이지 않을까 싶다. 몇 개는 같고 몇 개를 다른 그런 상실감 그러니 나는 어떤 삶을 살다 가야 할까? 이도 저도 내 욕심 앞에서만 춤추는 그런 삶이 아닌 서로에게 이웃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나누며 사는 삶을 살다가 떠나야 한다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말 그 말을 할 것 같다. “다 가는 걸 뭐, 가야지 가야 할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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