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하고 싶은 것
내가 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아주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짝사랑’이다. 그 짝사랑은 2024년 여름, 나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고, 내 삶을 크게 돌아보게 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의 그 찌질하고 부끄러운 짝사랑을 담은 이야기를 빼곡하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꽤나 진행되어 상당한 페이지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브런치 스토리에 연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그 행위를 나의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어놓고 자신의 세계에 나를 초대하지 않았던 그에 대한 자그마한 복수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사랑이라는 오해가 남기고 간 것들’이라는 제목의 매거진을 발행하고 첫 번째 글을 작성하여 업로드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을 업로드하고는 별의별 생각에 빠졌다. ‘혹시나 함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보고 이 짝사랑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나중에라도 나의 정체가 들통나면 이 글을 보게 되는 내 지인들은 뭐라 생각할까?’, ‘이것이 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일일이 찾아 읽게 될 확률은?’, ‘브런치 작가가 된 나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공개할 확률은?’, ‘이 인기 없는 글이 내 미래에 영향을 끼치게 될 확률은?’
그 무엇 하나 확률을 따져봐도 1%의 가능성도 계산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무척이나 고민했다. 때론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그런 불안의 씨앗을 계속 남겨두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그 글과 매거진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나의 그 찌질한 짝사랑 이야기를 담은 글들을 내 마음속에 꽁꽁 가둬버렸다. 그 조치로 인해 나는 불안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근심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내가 원하던 그 짝사랑에 대한 사소한 복수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어떠한 커다란 뜻을 품고 시작한 일에도 누군가의 눈치와 세상의 이목에 신경 쓰며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가끔은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능이 이끄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어쩌라고”
내 인생에서 저 네 글자를 누군가를 향해 뱉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어쩌라고’라는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 인생에 나타났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은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뱉어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내가 전공을 바꿔 진학한 대학원의 동기였다.
내가 대학원을 진학하던 시기는, 코로나로 인해 모두들 사회적 격리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단절하며 지내다 그 조치가 해제됨과 동시에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누리기 위해 다양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와 같은 해, 같은 과 대학원 동기가 된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그러나 긴 시간 모두가 사회적 격리를 해왔기 때문인지 사람들과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고, 모두들 같은 공간에는 있지만 사회적 격리가 그러하듯 각자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학원 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대학원 동기와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고, 처음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수업이 끝나자 동기는 먼저, 다음에 커피 한잔 하자며 약속을 제안했다. 내 나이가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고 후반에 이른 뒤로, 나는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다음에 한 번 만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 되었고, 혹여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실제로 만난 다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생활을 속에서 예의상 하는 이야기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 동기는 그 자리에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며 전화번호까지 물어온 것이었다. 그때의 그 순간 잊혀지 않는 것은, 그 동기의 말투, 억양, 눈빛, 태도에서 우물쭈물한다거나 어색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함께 수업 한 번 같이 들은 사람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약속을 제안한다는 사실이 신선하기도, 신기하게도 느껴져 나 역시도 쉽게 그 약속을 허락하였다.
그렇게 며칠 뒤 함께 커피 한 잔 하며, 왜 비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지, 지금까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단 두 번 만난 사람과 이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로서는 꽤나 어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 그 동기의 자연스러운 질문과 반응, 악의 없어 보이는 태도가 부담스럽기보다 솔직하고 쿨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솔직한 사람을 무례한 사람이라 여겼던 것 같다.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 타인의 생각이나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필터링하지 않는 무절제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면서도 그런 ‘솔직함’이 느껴지는 사람과는 오랜 기간 관계가 유지되지는 못했다. 때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적당한 말만 둘러대고 그 솔직함에 상처받고 싶지 않아 은근슬쩍 피하다 보니 어느새 그 사람을 깊이 알기 전에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학원 동기와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그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 동기는 대학원 생활을 보내며 사람에게나 어떤 상황에서 자주 “어쩌라고”라고 말했다. 처음 그 네 글자는 나에게 무척이나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런 말은 30대 중반의 어른들이 쓰는 말은 아니라 생각했고, 그 말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 틀림없으며,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년간 그 동기를 지켜보았지만 ‘어쩌라고’로 인한 악몽은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동기는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늘 단순하고 홀가분해 보였다. 내가 안전한 상황을 찾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동안, 그 동기는 늘 ‘어쩌라고’의 정신으로 스스로를 그 상황과 관계에서 완전하게 해방시켜 온 것이다.
대학원 동기의 ‘어쩌라고’는 악의 없는 순수한 질문과 대답 같기도 했다. 때로는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라고 해석되기도 했고, 때로는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을 거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인간관계에서는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마시오’로 읽힐 때도 있었고, ‘더는 말도 하기 싫으니 그만하세요’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 동기는 타인을 향한 적당한 거부와 자신이 알고 있는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나타내는 문장들을 네 글자로 요약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라고”
그리고 그 모든 질문과 대답에 주인공은 그 동기 자신이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로지 나의 마음에 집중한 질문과 대답.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던 네 글자가 어느덧 그녀의 솔직함을 매력이라 느낀 후에는 오히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딱 잘할 수 있는 만큼 사회생활을 하고, 내가 원하는 인간관계를 맺어나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정도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는 그 동기의 태도가 어쩌면 굉장히 매뉴얼화되어 있는 사회생활을 해온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 대학원 동기의 "어쩌라고"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인 것이 분명하다. 그 새로운 세계는 동경이지, 반드시 그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그런 관계가 가끔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이제 나는 마음속으로 "어쩌라고"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 마법 같은 주문을 통해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가끔은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본능이 이끄는 삶으로 점차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네 번째 버킷리스트.
□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나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