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감정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가질 거 적당히 가지지 않았나? 눈치껏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말이지? 감정을 느끼는 데에도 눈치를 보고 있다니... 그렇다고 한없이 우울한 것도 아니었다. '이게 다야?'라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이다. 끈적한 그물에 쌓인 것 같아 불쾌했다.
내 인생은 큰 굴곡 없이, 나름 순탄하게 흘러온 편이었다. 여러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성취를 맛보았고, 일도 다양하게 익혔다. 독일 베를린에서 쌓은 해외 커리어도 있다. 웹툰을 연재하기도 했으며 글도 정기적으로 기고한다.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할만한 재료를 꽤 모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포장하다 보면 스스로가 사기꾼처럼 느껴져('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마냥 신나지는 않았다. 열심히 포장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내 안의 허무함을 더욱 부풀린 일이 하나 있었다. <전략 삼국지>라는 만화책을 읽었을 때다. 일본의 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1971년부터 17년 동안 연재한 만화 삼국지를 60권의 단행본으로 엮은 작품이다. 원래부터 삼국지를 좋아했지만, 그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삼국지의 엔딩(?)은 다음과 같다. 이야기의 중심인 유비, 관우, 장비가 이끄는 촉나라는 후반 들어 어이없이 무너진다. 이후 위/촉/오 삼국의 분열이 서서히 정리되어 가는데... 재밌게도 중국을 통일한 것은 위/촉/오 그 어느 나라도 아니다. 사마 씨 세력이 위나라를 멸망시켜 진나라를 세우는데, 천하통일의 주인공은 바로 이 진나라다.
허망함을 느낀 것은 천하통일을 이룬 진나라의 운명을 알아버린 순간이다. 진나라를 이끄는 사마 씨 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간다. 그리고 그 안의 주요 세력들은 자연스레 부패해 갔다. 이후 사마 씨 세력은 조금씩 분열되며, 결국 진나라는 천하통일을 이룬 지 40년도 안 되어 외부침략으로 인해 멸망한다. 이럴 거면 천하통일이 다 무슨 소용이었는가? 허망하다, 허망해. 천하를 무대로 하는 원대한 꿈? 영웅호걸들의 패기? 그게 다 어쨌는데?
이런 생각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공허하기만 한 삶은 아니었으니까. 비율로 나타내자면 행복5:공허5 정도가 아니었을까. 자각은 있었지만 어떻게 떨쳐내야 할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배부른 소리라서 미안하지만 아마 적당한 행복에 질린 상태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