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후 보상, 보상 후 고통. 이 순서에 대한 나의 고민은 계속해서 깊어져 갔다.
나는 음식에 환장하는 놈은 아니다. 숨겨진 맛집 정보를 들어도 심드렁하다. 그래도 순살 치킨을 매콤한 소스에 찍어먹는 행복은 잘 이해하고 있다. 맛에 까탈스럽지 않으니 뭐라도 신나게 먹는 타입이다. 그러나 나의 적당함을 박살 내기 위해선 운동뿐만 아니라 먹는 것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식욕을 억제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PT 등록 후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는데 전혀 즐겁지 않았다. 퇴근길에 보이는 분식과 크림빵이 나를 괴롭혔다. 먹어봤자 후회한다는 마음으로 버텼지만 그 유혹이 사라질리는 없었다. 계속 참는 방식으로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애초에 왜 맛있는 걸 먹어야 하는가부터 공부해 보기로 했다. 맛있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왜 기분이 좋지? 좋으니까 좋겠지? 아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킨, 피자, 초콜릿, 떡 같이 대중적으로 '맛있다'라고 대우받는 음식은 대체로 열량이 높다. 그리고 원시적인 나의 신체는 '눈앞의 고열량 음식을 지금 당장 먹어치우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라!'라며 호들갑을 떤다. 고열량 음식을 탐하게 만듦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원시인의 삶에서 고열량 음식은 귀하므로, 발견 즉시 먹어치우는 것이 이득이라고 프로그램되어 있다. 집 밖에 널린 게 고열량 음식인 것도 모르고.
문제는 이 프로그램은 고열량 음식이 귀한 상황에서만 유용하다는 점이다. 원하면 언제든지 떡볶이와 쿠키를 입에 넣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역효과다. 가끔 먹으면 문제없지만, 맛있으니까 계속 먹게 된다. 열량은 들어오는 족족 몸에 축적된다. '이 정도 열량이면 충분하니 그만하자'라는 제어 시스템이 없다. 몸은 편의점과 마트에 고열량 음식이 잔뜩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는 '맛있는 걸 먹고 싶다'라는 말을 '열량을 축적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로 바꿔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떤 느낌이건 간에 원리 위주로 해석하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절제력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필요도 없는 열량을 축적하려는 충동에 이끌려 바닐라 라떼를 주문하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았다고 해야 하나. 열심히 번 돈으로 스스로의 몸을 파괴하는 행위가 괴상하게 느껴졌다.
괴상함에 대한 자각이 반복되면서, 맛에 대한 갈구가 줄어갔다. 나도 사람이기에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맛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보다, 모순적인 행동을 하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커져갔다. 나는 음식이 당길 때마다 점검했다. 진심으로 먹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 충동인지.
맛있는 음식은 기쁨을 주지만 그만큼 신체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을 수백수천 번 외면해 왔다. 튀김우동에 파를 잔뜩 올려 죄책감을 덜어내려 애쓰는 내가 정말 별로였다. 먹기로 했으면 당당하게 먹으면 될 것을, 왜 애매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먹고 앉아있었을까?
샐러드 식단으로 바꾸고 약 3개월 정도 지났을까. 적당함의 상징이었던 뱃살과 옆구리살이 눈에 띄게 사라져 있었다. '오늘 뭔가 컨디션 좋은데?'라고 느끼는 날이 늘어갔다. 변비에 걸리는 횟수가 줄었고, 피부가 매끈해졌다. 세수하다가 뾰루지가 말끔히 사라진 걸 알아챘을 땐 계속 “헐”거렸다. 작은 변화들이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지식과 의도를 갖고 행동할 때의 기쁨을 알아갔다. 나는 여전히 30대 중반의 적당한 직장인이었지만, 하루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어갔다.
나는 더 많은 변화를 원했다. 스스로를 통제해 나가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3개월 운동 & 식단 챌린지!' 같은 것보다, 내면의 무언가를 더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싶었다.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다야?’라는 의문이 풀린 건 아니었다. 단지 운 좋게 발견한 변화의 모멘텀을 계속 밀어붙이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