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 모 대학 프로젝트를 소개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지인이 운전하고 나는 조수석에 동승했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강원도 접경에 접어들었다. 출발한지도 꽤 되었고, 목도 축일 겸 휴게소에 들르기로 했다. 때마침 걸려온 전화로 나는 차에 남아 통화를 했고, 지인 먼저 휴게소로 향했다.
꽤 긴 통화를 마친 뒤 휴게소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나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로 다가오는 지인의 손에 커피 한 잔이 달랑 들려 있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오는 것으로 보아 내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가실까요?
당황한 나는 허둥지둥 차에 올랐고, 차는 유유히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이후 상황은 상상하는바 대로다. 볼쾌했고 왼쪽으로 고개 돌리기가 불편했다. 막역한 사이라면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며 타박이라도 하겠지만, 수년 전 함께 잠깐 일한 게 전부다.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목적지까지 갈 수밖에. 그날 좁은 차 안에서 느꼈던 불편한 공기는 한동안 불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속 좁다 해도 할 말은 없다. 이후로 내가 그 지인과 같은 차에 탄 일이 있을까? 없다. 그럴 일도 없었지만 있다 하더라도 가급적 다른 이동 수단을 찾지 않았을까.
강의 중 종종 이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그리고 묻는다.
이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까요?
그러면 대개는 배려심이 부족했다며 내편을 들어준다. 그런데 문제없다는 대답도 간간이 나온다. 열에 두셋은 되는 것 같다. 사다 달라고 하지 않았고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데 사다 줄 이유가 없다는 거다.
흥미로운 건 지역과 세대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지방으로 갈수록 그리고 연배가 높을수록 지인은 문제 많은 사람이 된다. 심지어 강원도 어촌 원로들은 그런 몹쓸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말라고 훈수까지 둔다. 좋을 일이 없단다. 자기 커피만 챙긴 게 몹쓸 짓까지 되어 버린 것이다.
반면 도리어 사다 주는 게 문제라는 친구들도 있다. 청소년들이다. 사다 줬는데 하필 끔찍하게 싫어하는 종류면 어떻게 할 거냐는 거다. 각자 알아서 챙기는 게 최고란다. 한편 봉사가 체질인 집사님들은 휴게소로 가기 전 “뭘 좀 사다 줄까요?” 하고 묻는 게 지혜란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도 정리되어 갔다.
그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모든 문제는 주관적이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 아냐?”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봐 다 그렇다고 하지!”라고 확신하며 흥분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며 내 입장에서 문제인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분명한 건 당시 나는 상대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내가 입은 피해는 무엇일까.
지인 손에 들린 커피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당혹스러웠다. 이어서 서운함이 올라왔고, 무심함에 화도 났다.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불편함을 견뎌야만 했다. 이게 그때 내가 입은 피해다.
한 대 맞거나 돈을 떼이는 것처럼 실제적인 것만을 피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도 피해가 될 수 있다. 물론 지인은 나에게 피해를 줄 의도가 없었다. 그랬다면 그건 갈등이 아니라 범죄의 영역이 된다. 갈등이 그렇다.
만일 지인이 아니라 친한 동료나 가족이었다면 엉뚱한 데 화를 풀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영문도 모른 채 부당하게 공격을 받은 상대가 반격을 가할 수 있다.
갈등의 동력인 '악순환'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날 이후로 그를 볼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좋던 관계를 불쾌하게 만들고 피해를 만들어내는 갈등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갈등은 반경 50미터 안에서 일어난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게 가족이다. 세탁소 주인과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언제든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등에는 서로 간 다름이 존재한다. 그 다름은 목표일 수도 있고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가치나 신념일 때도 있다. 나는 서로 챙겨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반면 지인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름으로 피해가 발생한다. 피해를 입었다고 느낀 사람은 상대방 때문이며 상대방이 그러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상대방이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다보나 그 피해로 인한 비용을 상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요구를 상대가 무시하거나 거부할 때 갈등은 탄생한다.
그렇게 긴장에서 시작된 갈등은 입씨름과 행동, 편짜기, 체면 깎기 등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공멸을 향한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갈등의 얼굴이다.
갈등은 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는 새 갈등은 스스로 힘을 키우고 관계를 파괴한다. 어쩌면 우리가 갈등을 보려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때로는 격정으로 때로는 두려움에 눈이 가려서. 갈등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서 망연자실하여 그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다.
한여름 밤 올라오는 불쾌한 습기처럼 스며들어 우리를 불면의 밤으로 이끄는 갈등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갈등은 두렵고 피하고 싶다.
그런데 갈등은 억울하다.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압할 정도로 갈등을 방치하고 키운 사람이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