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폭력의 온상이다. 모든 폭력이 갈등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관리되지 않은 갈등은 반드시 폭력을 낳는다. 그게 신체적 폭력일 수도 있고, 언어나, 정서, 감정적 폭력일 수도 있다. 특히 대체 불가한 존재인 가족 간 폭력은 탈출구는 좁고 상처는 깊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가정폭력이라고 하는 괴물이 어떻게 살아남아 대물림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계에 잠복해 있던 폭력성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한 인간의 삶을 잔혹하게 파괴한다.
기이하고도 서글픈 형질(形質)의 변화를 꿈꾼 한 여자의 몰락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영혜란 이름이 그렇고, 코가 좁은 구두를 신고 온 소개팅남이 그랬다. 그 남자가 영혜를 선택한 이유도 그녀의 평범함이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도입부의 평범함은 이어서 벌어질 극적 반전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언젠가부터 불길한 전조가 스미기 시작한다. 동시에 언젠가는 그녀의 의지를 뚫고 삐져나올지 모를 무언가도 고개를 내민다. 자라면서 그녀도 모르게 내면에 뿌리내린 폭력성이다.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강의 채식주의자-
깊은 우물과도 같은 무의식 안에서 어른거리는 그것은 의식 위로 베일이 덥히는 꿈속에서 끔찍한 영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불안과 혐오가 얼마나 컸던지, 꿈속에서 자신의 맹수적 공격 본능을 경험한 뒤 손톱과 이빨이 여전히 온순하고 부드러운지 확인해야만 했다.
매일 밤 벌어지는 끔찍한 의식(儀式)을 피하려 선택한 채식(菜食)은 역설적이게도 유일하게 공격성이 없어 경계하지 않았던 신체 일부를 날카롭게 만든다. 몸으로부터 돌출되어 있는 가슴은 신체 기관 중 유일하게 공격성이 배제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 변화는 마치 합병증을 불러와 실낱같은 희망마저 짓밟아버리는 불치병과도 같이 주인공을 공포로 몰아간다.
한편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에 대한 그녀의 힘겨운 저항은 도리어 가족의 집단 무의식에 봉인되어 있던 괴물을 밖으로 불러낸다. 어느 날 갑자기 재현된 친부의 폭력이다. 그 충격으로 위태롭게 버텨오던 그녀의 정신세계에 금이 갔고, 자아는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지극히 차분해 보이는 이 여인의 내면에는 어떻게 해서 폭력의 씨앗이 심기게 됐을까. “월남에서 죽인 베트콩 일곱 명“으로 시작되는 무용담을 스스럼없이 늘어놓을 정도로 폭력에 둔감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딸을 문 개쯤은 거리낌 없이 제거할 대상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동안 억눌러왔던 공격 본능을 은근히 풀어놓을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사립문 앞에서 정겨운 눈길을 나누었을 개는 주인을 물었다는 이유로 오토바이에 달린 채 피눈물 쏟으며 마을을 돌아야만 했다. 참혹하게 죽어간 그 개는 폭력성을 나누어가진 부녀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대물림은 일상에서 부모와 자녀가 교류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물림된 행동이나 가치는 다음 세대에서 패턴으로 드러나는데 그 중 폭력도 있다. 그런데 모든 폭력이 그렇지만 특히 가족 간에 벌어지는 폭력은 가하는 주체나 당하는 대상이 서로 대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내상은 깊고 탈출구는 좁다.
영혜네 역시 습관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전형적인 역기능 가족이었다. 아버지 속 달래줄 술국 끓이는 역할로 안위를 보장받은 언니나 받은 만큼은 어딘가에 반드시 되돌려주고야 마는 막내와 달리 숙명적으로 불행한 서열에 놓인 영혜는 아버지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도망치거나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내는 수동 공격적인 태도가 아버지를 더욱 자극하였는지도 모른다. 감정 기복이 없고 무표정해 보이는 그녀의 이면에는 대물림된 폭력성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가장 기본적 욕구인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자란 언니는 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하는 죄책감까지 얻게 된다. 그녀가 강박적으로 보이는 희생은 자신의 선함을 확인하려는 수단인지도 모른다. 하나 어린 시절 생겨난 구멍은 크기가 너무 커 메워지는 속도가 소실되는 속도를 따르지 못했다.
한편, 평소에도 소통이 원활치 않아 왕래가 드물었던 아버지가 격분한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순간 흥분해서 그가 취한 방법은 과거에 익숙했던 방법, 몸이 기억하는 방법 폭력이었다. 격발 된 부친의 폭력은 불안정하게나마 버텨오던 영혜의 자아에 분열을 가져온다.
사방으로 금이간 그녀의 정신세계는 기이하면서도 애처롭다. 폭력의 소산을 통해서만 존재 가능한 동물의 속성을 거부한 채 식물이 되려 한다. 그리고는 식음을 전폐한다.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의연하게 존재하는 나무의 강인함을 동경하고 집착한 것이다.
영혜의 기이한 의식 세계가 줄기를 뻗어 탐미적(眈美的) 예술 행위에 집착하는 형부의 욕망을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탐미적 예술 행위와 육체적 욕망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던 형부가 단지 식물의 감각적 이미지에 집착했다면 영혜는 강인하면서도 의연한 특질을 동경했다.
또한 형부가 신체에 식물 이미지를 래핑(raping)함으로써 관능미를 더하는 데 그쳤다면, 영혜는 태생적으로 폭력의 소산을 섭식하며 생존할 수밖에 없는 잔혹한 동물계를 탈피해 근본적인 형질의 변화를 꿈꾼다. 파격적 의식으로 투합한 두 사람은 인륜마저 가볍게 뛰어넘는다.
가계에 흐르는 폭력성은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낮은 데 위치한 주인공을 향했다. 그리고 휴면 상태에 있던 폭력성은 폭력의 재현으로 발아한다. 안타까운 건 잠재되어 있던 폭력성이 외부가 아니라 그걸 경계하고 억압하느라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그녀 내부로 향했다는 점이다.
가련한 여인의 삶에 찾아온 몰락의 씨앗이 태아에게 생기는 몽고점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