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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별 Oct 13. 2021

오늘은 맛있는 것 좀 먹어야겠어요.

영광입니다, 소중한 치팅데이에!

"오늘은 맛있는 것 좀 먹어야겠어요."


 종종 듣게 되는 대사. 다이어트에 성공했거나 성공하는 중이신 분들께서 소중한 치팅데이에 음료를 주문하신다. 그냥 '단 것 좀 먹겠다'보다 찌릿한 감동. '오래 참아왔으니 인고의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제일 먹고 싶던 것을 먹으러 왔습니다, 참고 참던 음료 오늘 드디어 마시겠습니다, 어서 주세요, 맛있게 주세요' 잡념 많은 나는 이렇게 부풀려 해석하며 "아고 이런 날 더더더 맛있는 것 드셔야지요, 저희 집에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하며 벅차오름 담긴 음료를 전한다. 음료를 받아 드는 고객님 눈빛 덕에 온종일 정수리에 팡팡 불꽃 터지는 기분이다. (비슷하게는 시험 끝난 날, 월급이나 용돈 받은 날, 회사에 한턱 낼 일 생긴 날 등이 있다. 오, 7평의 영광!)


 "사장님, 오늘은 제가 맛있는 것 좀 사 가볼게요!"

 키오스크를 누르며 통화하신다. 아 또 입이 찢어진다. 뚝뚝한 '음료 사갈게요'도 아니고 '음료 사지 마세요. 제가 샀어요'도 아니고 '오늘은 제가 맛있는 것 좀 사 가볼게요' 라니! 영화의 명대사처럼 가슴에 콕 새겨진다. '사장님께서 늘 준비해주시는 음료도 맛있지만 그 배려에 감사의 의미로 제가 오늘은 매우 특별한 음료를 들고 갑니다' 커피 한잔, 버블티 한잔에 거창한 의미를 잔뜩 부여하며 만든다. '그냥 저렴하니까' 가볍게 오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나 혼자 상당히 묵직한 마음으로 출근하고 있다. 우유 OOO밀리리터, 파우더 O스푼. 시럽 O번. 본사에서 보기 쉽게 만들어준 레시피를 여전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만든다. 오늘은 맛있는 것 좀 사 가보겠다 하셨는데, '과연 맛있다'로 결론이 나야 할 텐데, 긴장된다.



 

 배꼽 잡을 준비 하시라. 초보사장은 가끔 이 작은 7평에서 의료진이 된 듯 비장해지기. '푸핫. 무슨?' 하겠지만, 여름이면 하얀 가운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게 밖 도로를 바라보다 '앗 설마 아지랑이?' 하며 놀라는 무더위에 촛농처럼 흐물거리는 고객분들께서 들어오신다. 한숨인지 문장인지 구분하기 힘든 기운 빠진 "안녕하세요 하아"는 마치 '어.. 어.. 얼음을...... 어서... 흐읍, 살려... 줘......' 하시는 듯하다. 그럼 나는 고객님 취향에 따라 제조된 얼음을 처방한다. 헤이즐넛 얼음, 타로 얼음, 홍차 얼음. 제빙기 두 대가 삐뽀삐뽀 돌아가지만 작은 가게 맞춤용 크기이기에 응급 구조용으로 부족할 때가 많다. 냉동실에 준비했던 비상 얼음까지 동이 나면 근처 대형 병원(마트)에 소수문 하기 시작한다. "여보! 얼음!!" 응급차 휴일 대기조는 남편, 평일에는 "언니 정말 정말 미안" 하며 영완 언니, 경아 언니의 차량 지원을 받았다. 주로 쓰던 각얼음이 없을 때는 '헉' 소리 나는 대형 돌얼음이 도착하기도 하고 재글재글 소리 는 귀여운 잔얼음이 오기도 한다. 정말 급할 때 편의점 구호품까지 털어온 적도 있다.

 

타오르게 그리고 잔잔해지게 만들어주는, 감사한 작품

 상상 속을 여행하다 고개를 들면, 사계절 내내 여름처럼 타오르게 해주는 그림에 눈이 멎는다. "고객님께 선물 받았어요." 그림에 대해 묻는 분들께 대답하며 매번 두근거린다. 시들하다 싶을 때 화라락 피어나게 해 주고 열이 차오를 때면 촤르르 파도로 식혀주는 감사한 작품. 감사한 사람.

 

 실상 최고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건 나다. 어디에서나 보는 흔한 얼음에 마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만병통치약을 발견한 듯 '감사합니다' 해주시는 분들 덕에 사명감이 생긴다. 분명 '파는 사람'이 되겠다고 가게를 열었는데,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을 입구, 7평의 풍경

 새로 생긴 가게 크로플이 맛있다며 배실배실 웃으며 놓고 가는 귀여운 커플, 꽃시장에 가서 사장님 생각났다며 반다발씩 나누자 하시는 아이 엄마('꽃이 사장님처럼 예쁘다'는, 차마 적기 곤란한 간지러운 문장까지), "농협 사과가 맛있더라고~" 단단히 묶인 포장을 굳이 힘주시며 뜯어 꺼내 주시는 어르신, 가을은 감이라며 홍시 하나 단감 하나씩 올려주시는 사장님, '몸에 좋다니까 한번 드셔 보셔~'하며 수제 정과 두고 달아나는 쌍둥이 엄마. 연고 바르고 '후후' 불어주던 엄마 입김 같은 분들이다. 음료를 팔기보다 '감사합니다'를 모으는 일, 나의 일을 이렇게 되새기곤 한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에 군고구마 통 그림을 입혀 본다. 내가 기대어 선 카운터가 어묵 포장마차로 보이기도 한다. 가끔은 길에 돗자리를 펴고 발열 장갑을 판매하는 상상도 한다.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장갑이 아닙니다. 이 뜨아 장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은 장갑 하나요!", "투엑스라지 주세요!", "초코색 장갑 찜해둘게요." 떠오르는 얼굴들에 건넬 장갑을 상상하며 에어컨을 끈다.


 몸이 겨울 준비를 하려는지 식욕이 몰아친다. 참아내려 노력하는데 영 어렵다.

 에잇 안 되겠다. 오늘은 안 예쁜 구석 없이 예뻐 부러운, 옥경 씨네 초밥집에 가야지. 나도 셰프님들께 흰 가운 입혀 드려야겠다.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아요. 오늘은 맛있는 것 좀 먹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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