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출근길,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바삐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다.
아침부터 학교에 아파서 오지 못한다고 연락이 온 아이들이 벌써 세 명이나 있었다.
현재 시각 8시 5분.
"OO엄마입니다. 오늘은 생리결석으로 처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앞뒤의 자세한 설명은 굳이 없다 하더라도 '처리'라는 단어가 마음에 맴돌았다.
'처리' 명사
(1) (기본의미) 사건이나 사물 등을 다루어 문제가 없도록 마무리를 지음.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두 명의 친구가 문자를 남겼다.
"선생님, 저 오늘 배가 아파서 못 가요. 생리결 쓸게요."
"그래, 알겠다. 부모님께 직접 문자 남겨주시거나 연락 주시라고 하렴."
"부모님 바쁘신데요. 저만 그냥 말씀드리면 안 돼요?"
"응, 안돼. 보호자 확인이 있어야지. 학기 초에 선생님이 분명히 말했는데. 연락 주시라고 하렴."
아픈 것을 참아가며 학교에 오고 아파도 참고 공부하라는 것은 분명 폭력이며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났다.
그리고 생리 결석은 당연히 써도 되는 인정 결석이 맞다.
그러나
시험이 가까워질수록(특히 시험 전전날일수록 결석이 많다.), 모의고사 날일수록, 날씨가 궂은 날일수록 생리결석이 많다. (모의고사날은 수능때와 마찬가지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등교해서 평소보다 늦게 끝난다. )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당연하지.
날씨와 시험과 연관짓지 말자.
나의 개인적 판단은 유보.
아픈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규정을 어긴 것도 아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어느 순간부터 나의 개인적인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것을 악용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교육적인 훈육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리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악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좋은 제도를 악용할 때 또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되고 내용이 변질되는 것이다. 목적에 맞게 활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달린 것이고 그 양심에 기초한 삶이 도덕성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겠지. 지금은 모르더라도 나중엔 알겠지.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될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