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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빛 Aug 18. 2024

수행평가에서 한 번도 점수를 깎여본 적 없어요.

선생님, 왜 제 수행평가 점수 깎으셨죠? 전 이해가 안 돼요.

"이번 수행평가는 '000 00'이라는 소설을 함께 읽고 주인공의 삶에 대해 모둠별로 이야기를 나눈 후 서평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첫 시간엔 아이들과 돌아가면 소설을 함께 읽고 두 번째 시간엔 인상적인 구절과 장면, 그 이유에 대해 모둠별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주인공이 한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 뒤 나는 모둠별로 찾아가 발표 내용을 들었다.  


"나였더라도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 우선 생계를 위해서는 직장을 다녀야 하잖아. 그리고 처음에 모르고 한 일이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해돼."

"요즘 세상에 자기가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야? 이 주인공을 나쁘다 할 수는 없어."

"돈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용해보지도 않은 상품의 사용후기를 거짓으로 쓰는 것은 나쁜 것 같아."

"하지만 주인공 입장에선 그 후기가 그렇게 큰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생각 못했을 것 같아. 가습기 살균제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줄 알았다면 애초에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 주인공은 몰랐었잖아."

자유토론의 시간에 아이들은 거침없이 주인공의 입장을 옹호하며 자신이었더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공감했다.


"여러분,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소설을 썼을까요? 과연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왜 제목이 '000 00'일까요? 다음 시간까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오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토대로 새롭게 알게 된 점과 깨달은 점에 대해 작성해 보세요. 그리고 서평은 일주일 후에 작성할 텐데 그동안 이 소설과 관련된 기사와 뉴스에 대해서도 찾아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에 함께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주일 후, 아이들은 계획대로 서평을 작성했다.

물론 서평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정답은 없다. 하지만 타당한 근거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펼쳐가는 것,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 글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 등등은 기본 요소였다.


며칠 뒤, 아이들의 점수를 확인하는 날 한 아이가 자신의 점수가 납득이 안된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선생님, 왜 제 점수가 깎였어요? 저 한 번도 수행평가 서평에서 깎여본 적 없어요. 전 제 나름대로 정말 글을 잘 썼다고 생각해요."


"OO아, 선생님이 생각할 때는 돈을 벌기 위해서 주인공이 한 일은 어쩔 수 없지 않았나라는 너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해.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비도덕적인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어. 모두가 자신의 상황에서는 선택지가 그것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까?"


"선생님, 서평은 자신의 생각을 쓰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제 생각도 존중해 주셔야죠. 그래서 저도 주인공이 한 행동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저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쓴 거잖아요? 그리고 제 글에 왜 통일성이 없어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 부분과 이 부분을 보시면서요 충분히 통일성이 있는데요. 통일성을 100으로 생각한다면 80% 이상이면 통일성이 있는 거 아니에요? 전 선생님께서 제 점수를 깎으신 것이 정말 납득이 안 돼요."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처음 부분에서는 이렇게 주장을 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이렇게 다시 너의 입장을 바꿨고 그 주장에 대한 근거도 논리적이며 타당하다고 볼 수는 없어. 선생님은 100명이 넘는 학생의 서평을 읽었고 동일한 기준으로 채점을 했단다. OO아, 이 교과의 전문가는 그래도 너보다는 선생님이지 않을까? 그리고 너의 글은 세 분의 선생님이 함께 평가한 결과야. 그렇게 해서 낸 평가 결과란다. 선생님의 채점 결과를 네가 수용해 줬으면 좋겠다. 선생님은 이번 계기를 통해 글을 쓰는 방식을 좀 더 배워 네가 좀 더 성장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전 너무 억울해요. 전 분량에 맞게 엄청 열심히 썼거든요. 제가 수행평가를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요. 선생님, 저 이 점수받으려고 다른 과목 수행 소홀히 하면서 국어 수행 준비한 거 아니거든요. 저 이번에 국어 등급 잘 받으려고 진짜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수행평가 깎여서 저 이제 등급도 안 나와요. 그러면 저 대학도 못 간다고요."


"선생님도 마음이 아프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가 기준에 따라 채점한 점수를 수정해 줄 수는 없어."




그리고 여지없이 며칠 후 민원이 들어온다.

우리 선생님들의 채점 방식에 대하여...



  "대학에서 수시 논술에 불합격하게 되면 그 이유를 대학에 찾아가 어떤 근거로 불합격됐는지 꼬치꼬치 캐묻는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논술준비를 했는지 하소연하며 어떤 채점 근거를 기준으로 불합격시켰는지 억울하다며 민원을 넣는가?"

"또한 대학은 불합격시킨 학생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평가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가?"

"정작 대학 수시 논술에 불합격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 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전적으로 수긍하면서 학교 수행평가에서 1점 깎이면 채점 기준 운운하면서 선생님의 채점 기준에 불만을 제기할까?"

"문제 제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더 심하게는 학부모까지 아이의 수행평가 채점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교사는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불신의 대상이 되었는가?


교사를 불신하는 풍토에서 아이들은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을까?


자신의 선생님조차 신뢰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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