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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시간은 약인줄 알았는데.

<상처 회복에도 노력이 필요하더라.>

by 전인미D

어떤 상처는 시간만 지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상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어떤 상처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일상을 다른 것으로 채워나갔다. 그 상처는 안 보이는 기억의 뒤로 밀어놨다. 자연스럽게 점점 흐릿해지길 바라며.


그러나 시간이 약이 되지 않는 상처도 있다.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아픔을 이겨내고 상처를 치료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시간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상처에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도망을 쳤다. 그냥 세월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라며 믿으며.

그렇게 마음속에는 치유되지 않은 수많은 상처들이 비밀처럼 엉켜있다.

그러다가 일상에 균열이 가고 내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그 모든 상처들은 한꺼번에 튀어나와 나를 사정없이 괴롭게 한다.


평온한 일상에서는 더없이 여유 있고 이타적이지만, 괴로울 때는 무척 냉소적이고 칼날처럼 변하는 극단적인 내 이중성이 혼란스러웠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갖고 있지만 그 갭이 지나치다 못해 이건 지킬 앤 하이드 급이다.

상처를 모른 척 해도 그 흔적은 이유 모를 우울과 괴로움의 찌꺼기로 남아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어릴 때 어머니는 부정적인 감정을 참도록 지도하며 분노나 슬픔을 표출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어두운 방에 들어가 혼자 감정 추스른 뒤 나와야 했다.

빈 방에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슬프고 눈물이 나도 참고, 화가 나도 억울해도 참아야 했다. 모든 감정은 꾹꾹 눌러 담고 타인에게 노출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난 늘 생글생글 웃고만 다녔다.


오죽하면 선생님들이 "우리 민진이도 슬플 때가 있니?"라고 물었는데 그때도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학교 선생님이 나보고 슬픈 일도 없어 보인대."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왜 너도 슬픈 일 많다고 하지 그랬냐고 하셨다. '그래봐야 뭐가 달라지죠?' 나는 속으로 냉소적인 대답을 했다.


자연스레 상처나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쌓여왔다. 참고 참다가 하이드가 칼날을 꺼내 폭발할 때 상대편은 당황했다. 너는 원래 이런 거 다 이해해 주던 사람이지 않았냐며.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관계에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아가며 차라리 상처를 회피해 버리는 어른이 되었다.


슬픔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모르는데 그저 슬프다는 언어로 응어리가 해결이 되겠냐며. 어떻게 보면 솔직한 마음의 표현도 해결의 아주 작은 시작일 수도 있지만 도망만 치느라 상처를 들여다보며 마주할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상처들은 나에게 흉터를 남기고 사라졌거나 마음속 깊이 보관되었다. 일상을 바쁘게 사느라 모든 것은 잘 잊혀졌고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만 흐른다고 치유되지 않는 상처도 많다. 우리는 사실 최선을 다해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상처를 이겨낼 방법을 몰라서, 시간에만 기대 왔다.

정말 사소한 상처는 묵혀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상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의 어둠을 채우고 가슴을 짓누른다는 걸 알게 됐다.

상처를 치유하라는 건 누군가를 타깃으로 삼아 감정을 폭발시키라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시간 속에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찾아야 한다.


떠올리는 걸로 다시 아프겠지만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상처를 스스로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에게 말 못 할 이야기라고 해서 스스로에게서도 삭제해버려서는 안 됐다. 그리고 사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슬픔을 얘기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상처를 숨기고 없었던 것처럼 사는 게 미덕은 아닐 거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말할 수 조차 없다면 너무 외로운 인생이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거니까.


상처의 회복이란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짐이 조금 가벼워지고 이해의 감정으로써 상처의 눈덩이가 점점 작아지는 과정이다.


시간 지나면 다 괜찮다는 말은 왠지 내 상처를 사소하고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는 느낌이다.

시간이 지나서 안 괜찮아도 괜찮다.

내가 나약해서도 옹졸해서도 아니다. 그렇게 시간으로서 치유가 안 되는 상처도 있는 법이다.

모든 상처를 이해하고 용서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원래 인간은 못난 모습 수백 개를 숨기고 살고 있다. 상처받고, 못난 모습을 위로하고 나면 더 괜찮은 모습이 더해질 수 있다.

우리는 상처 속에 있을 때 지금보다 나아지길 바라게 된다. 이런 치유 성장을 거듭하게 되며 상처에 조금씩 초연해지기도 하고 아픔이 회복되기도 한다.


흉터가 남은 상처들은 시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 흉터는 내 보살핌이 필요하다. 따스한 햇볕으로 상처의 눈덩이가 조금씩 줄어들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

상처받고 못난 모습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구김살 없이 밝기만 한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이렇게 상처가 많은 게 내 탓인 거 같다는 생각은 필요 없다. 상처받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없다. 살다 보니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 뿐이다. 자책으로 상처를 숨겨봐야 아픔만 더 커질 뿐이다.


우리는 용감한 것처럼 행동하면 용감해질 것이고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면 행복해질 것이다.

매일 자신을 격려하라.

삶을 만드는 건 우리 생각이다.

-윌리엄 제임스-


어떤 상처는 수백 번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미 납득하고 치유가 된다. 대체로 상처로부터 도망치며 살아왔지만 이별의 아픔은 도무지 도망칠 구멍을 찾기 힘들 정도로 모든 순간에 아픔이 서려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상처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매일매일 시뮬레이션을 수십 가지를 돌려봤다. 어떤 변수를 적용해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납득을 하고 나니 상처 속에서 조금씩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니 귀여운 첫사랑의 추억이 되어있다.

마음의 이해는 머리의 이해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반대일 경우도 많기에 우리는 시간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상처를 품고 살게 된다.

두 이해는 타이밍이 자꾸 어긋난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의 이해와 마음의 납득을 연결할 수 있도록 자꾸 손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이 다시 상처를 들추게 되는 것 같아 자꾸 미루게 된다. 그렇게 시간만 흘려버린 채 해결 못한 상처들이 우리에게 남게 된다.

이성과 감성의 이해가 동기화될 때 그 상처는 비로소 나에게서 사라지게 된다. 아픈 과거가 아니라 귀여운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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