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홀로 가는 일본 여행. 내린 곳은 간사이 국제공항.
‘음, 일본 공기는 이런 맛이군.’
공기는 때로 요리와 같다. 같은 음식이라도 조리법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듯 햇빛, 습도, 바람의 조합에 따라 공기 맛도 달라진다.
잠시간 음미를 마치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전철과 지하철을 두세 번 정도 갈아타야만 했다. 익숙하지 않은 일본 철도는 내게 마치 던전처럼 여겨졌다. 나는 비장한 모험가가 되었다. 어떤 노선을 타야 하는지 몰라 지도를 붙잡고 씨름하고, 표조차 어떻게 뽑는지 몰라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손짓 발짓을 해댔다. 때로 으악! 반대쪽으로 왔어!라고 우왕좌왕 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맨 앞 칸에 탑승했을 때, 지하철이 지상으로 향했다. 한국과 달리 정면으로 유리창이 달려있는 일본 전철. 철로를 따라 내게 다가오는 일본 거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 멋지다. 오, 저거 영화에서 봤어. 전철이 지날 때 내려오는 가림막. 땡땡땡 소리와 함께 영화 주인공이 자전거를 세우곤 하지. 선로 옆 수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 역시 벚꽃의 나라. 봄에 왔으면 좀 더 예뻤겠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지하철 던전을 한참 즐겼다.
창 밖을 구경하다 다리가 아파와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저녁 다섯 시 삼십 분 정도. 좌석에 있으니 지하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누군가. 핸드폰을 바라보기도, 손잡이를 잡고 서서 내릴 차례를 기다리기도 하는 사람들.
‘퇴근하는 길이려나.’
모두들 딱히 창문 밖의 멋진 풍경에 관심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는 문득 우리나라 전철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있는 외국인 관광객 한 명을 상상해 봤다. 유리창에 붙어 별 것도 아닐 길거리 풍경을 특별하게 구경하고 있을 테지. 퇴근하는 누군가는 '저게 뭐라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담.' 하고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 다시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으려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던 길 역시 멋진 면모가 있을 테다. 단지 너무 익숙해진 탓에 그다지 음미하지 못할 뿐일 테다.
나는 새삼 여행의 의미에 대해 떠올려봤다. 여행은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밀어 넣는 행위이다. 환경이 변화하면 사람은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감각을 예민하게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렇게 섬세해진 감각은 때로 그냥 스쳐 보냈을 어떤 아름다움 들을 잡아내기도 한다. 똑같이 뜨고 지는 해일텐데 여행지에서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여행은 익숙함에 무뎌져 갔을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을 일깨워 주는 것 아닐까.
언젠가 여행은 그저 사치일 뿐이라 말하는 사람을 봤다. 일부 동의한다. 여행은 어떻게 보면 일상에서의 일탈 욕구이다. 익숙한 것에선 쾌감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때로 새로운 먹거리, 볼거리 등으로 쾌감을 느끼고 싶어 여행이 가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에이리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기쁨을 ‘인간 고유의 능력이 생산적으로 전개됨에 따라서 수반되는 정서의 상태, 존재에 내재하는 불씨.’라고 설명한다. 반면 쾌락은 ‘굳이 능동성(생동성이라는 의미에서)을 요하지 않는 욕망의 충족.’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새로운 무언가를 소비함으로써 내게 즐거움을 줄 거라 기대하는 여행은 쾌락에 가깝다.
기쁨을 충분히 느낀 사람은 성장한 내적인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 일어설 수 있으나, 쾌락에 의존한 사람은 내적인 성장이 없기에 스스로 일어설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여행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이뤄냈다면 그건 적어도 쾌락은 아닐 테다.
나는 이 여행에서 내적인 성장을 이룩해 냈나?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하니 무척 거창하게 느껴져 헛웃음이 났다. 글쎄, 단순히 생각해서 아름다움을 잔뜩 느낀 여행이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은 순우리말로 하면 '알음다움'이라고 한다. '모름다움'의 반대말인 거다. 사람은 보다 많은 것을 알아갈 때 성장한다고 하지 않는가. 기쁨이란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 대상에 대해 알아가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라 생각한다.
일본 지하철에서 나의 출퇴근길 또한 좀 더 세밀히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 이번 여행은 남는 게 많은 여행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