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의 휴일이었다. 암막 커튼을 열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뒤통수를 만져보니 간 밤에 다녀간 새가 집을 지어놨다. 눈살을 찌푸리며 창 밖을 내다봤다. 어딘가를 향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해는 중천에 있고 구름은 한 점 없다. 빌어먹을 날씨가 지나치게 화창했다.
부스스하게 앉아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들, 별일 없지?"
평소와 같은 아빠의 안부인사. 부모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들이 항상 걱정이었다.
"별 일 좀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이 똑같아."
갑자기 나도 모르게 뛰쳐 나온 불퉁한 소리. 되려 내가 놀라 황급히 수습하려던 찰나 아빠가 답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단다. 다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간단다. “
나는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회사 가기가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럼, 그만두던가.’
마음속 내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면 마음속 또 다른 내가 비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만둬도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일을 안 하면 돈도 금방 떨어질 텐데 어떡하려고.’
결국 회사를 그만둘 꿈도, 용기도 없었다. 마치 톱니바퀴가 가해지는 회전을 견디듯 출퇴근 버스에 몸을 실을 뿐이었다.
좋지 않은 감정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대충 전화를 마무리했다. 아빠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분명 나를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겠지. 의도는 알겠지만 되려 그 말이 ‘남들 다 견디는데 너는 그것도 못 견디니?’라는 질책처럼 다가왔다.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아빠는 어땠을까. 쳇바퀴 같은 삶을 아빠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건 분명 아빠에게도 좀 힘겨웠을 텐데.
아빠는 평생 힘든 기색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차마 아빠에게 그동안 어떻게 버텼냐고 묻지 못했기에 혼자 생각해 봤다. 그는 어떻게 쳇바퀴 같은 출퇴근길을 견뎌냈을까. 그는 평생 통신 장비 관련 중소기업에 다녔다. 아마도 그 일은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자신의 꿈과는 조금 거리가 먼 일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평생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가족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문득 회사에서 첫 월급을 탔을 때 일을 떠올렸다.
“선물로 뭘 사면 좋을까요?”
첫 월급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을 때 직장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빨간 속옷 사가라. 원래 부모님한테 하는 첫 월급 선물은 그런기다.”
거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붉은색은 복을 불러온다지 않는가. 상징적으로 괜찮다 싶어 부모님에게 빨간 속옷을 선물하기로 했다.
백화점에서 점원에게 빨간색 남녀 속옷 세트를 주문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주 큰 복이 깃들기를 염원했으므로 한마디 덧붙여서 말했다.
“제일 화끈한 색상으로 주세요.”
가족들이 저녁상에 모이고, 부모님이 선물 상자를 뜯었다. 막상 꺼내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화끈한 것이 있었다. 야하다 못해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빨간색.
“푸하핫, 고마워. 하하, 잘 입고 다닐게.”
부모님이 박장대소를 했다. 그걸 입고 다닐 부모님을 상상하니 나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빨간색이 복을 부른다잖아. 제대로 복 부를 거 같은 색이네.”
첫 월급으로 한참 낄낄거렸던 저녁 시간. 돈을 번다는 건 이런 즐거움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은 그 속옷을 입지 않고 옷장 깊숙이 마치 부적처럼 고이 모시고 있다. 나는 아빠의 출퇴근길이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염원하는 발걸음. 누군가의 행복을 기원하며 한 걸음, 소중한 것들이 무탈하길 바라면서 또 한 걸음.
그가 나선 길은 쳇바퀴 같았을지언정 옷장 속 빨간 부적보다 훨씬 많은 웃음을 지켜왔을 거다. 그건 분명 무가치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