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 비행기
밤을 새웠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탓도 있지만, 실제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안 하던 걱정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내가 잘 다녀올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여행을 즐기고 올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 잡힌 채 말이다.
새로 생긴 제2 터미널에 도착한다. 군대에서 신문 광고로 접한 바로 그 터미널이다. 운이 좋게도 대한 항공을 탈 수 있게 되었다. 인천 공항의 풍경은 언제나 낯설고 신비롭다. 기껏 해봐야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말이다. 별문제 없이, 너무도 쉽게 비행기에 탑승한다. 프랑스로 향하는 비행기. 이중에 나와 함께 남미로 향하는 사람도 있을까?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중국, 대만, 유럽에 이어 대한민국을 떠나는 네 번째 비행이다. 2번의 경유. 33시간의 비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손이 떨려온다. (과장이 아니다) 내 긴 여정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이유는 몰라도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라 내 손에서는 땀이 차기 시작한다. 한 달, 과연 긴 여정인지는 의문스럽지만, 에펠탑에 이어 남미는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그저 '꿈'으로만 꿔왔던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옆자리에는 스페인 아저씨와 그의 딸이 앉아있다. 또다시 축구로 대화를 튼다. 베티스와 세비야의 팬이라는 아저씨.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시키고서 밥을 먼저 먹고, 버섯, 시금치 그다음 무생채를 먹는다. 지켜보다가 나중에 내가 섞어먹는 것이라고 말하니 표정이 안 좋아지신다. 진작 말해주고 싶었지만,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렇게 먹지 않는 듯, 자연스러운 식사에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면서 안달루시아 아래에 있는 자기가 살던 지방에서는 음식을 4 단계로 나누어 먹는 전통이 있다고 하신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그럴싸한 변명이다.
비행기 안에서 소설책을 읽다 보니 문득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 놀란다. 소설을 읽으면 금세 내가 소설 속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마련인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불이 꺼져있는 캄캄한 비행기 안이다. 옆에서 딸 어깨에 기대어 어렵게 잠을 청하시는 스페인 아저씨. 복도 건너편에는 이상한 게임이나 하고 있는, 목디스크가 걸린 듯한 아주머니. 이륙부터 지금까지 8시간 동안 줄곧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아이. 이곳에서 불을 켜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우크라이나 인근 러시아 상공을 지나는 중이다. 잠도 자고, 게임도 하고, 책도 보고, 밥도 먹었지만, 아직 1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계획을 충분히 세우지 못했다. 언제든지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떠나던 나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번 여행의 끝은 어디일까.
드디어 파리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문 밖으로 빛나는 에펠탑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3년 만에 다시 밟은 샤를 드 골 공항이다. 처음 파리에 왔던 그 기분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지만, 경유지로서의 파리를 다시 밟은 기분도 꽤나 흥미롭다.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얼마나 위대한 경험을 할지. 추측만으로도 설레는 순간이다. 요즘 남미에도 한국인이 워낙 많다. 내가 여행에 처음 관심을 가지던 중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절대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멀리 떠나는 여행자가 마냥 대단해 보였는데, 이젠 기본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한국인이 없을까. 얼마나 더 많은 곳을 가야 '여행 좀 다녔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파리에서 상파울루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는 내내 잠만 잔다. 피곤에 찌들어서 진짜 하루 종일 잤다. 12시간 중 9시간을 잠만 잔 것 같다. 옆에는 브라질 커플이 있고, 뒤에는 축구선수 카카를 빼닮은 아이가 있다. 브라질행 비행기라 그런가 브라질 사람이 대부분이고, 백인이 더 많다. 펠레를 생각하며, 브라질 사람은 흑인일 것이라고 생각한 내 선입견의 오류이다.
브라질 땅을 밟는다. 날씨는 마치 봄과 같다. 어쨌건 브라질 공기도 한껏 들이마셔본 뒤, 마지막 비행기를 기다린다. 공항을 빠져나가진 못했지만, 작은 기념품 샵만 보아도 여기가 브라질이라는 사실을, 남미 대륙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비행기 좌석 왼쪽에는 독일 아주머니가, 오른쪽에는 목에 거미 문신이 있는 이스라엘 아저씨와 같이 탄다. 결국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두기 위해 챙겨 온 스페인어 책은 몇 장 보지도 못하고, 소설도 3개밖에 읽지 못한다. 가자마자 공항에서 다 버려야 할 것 같다.
드디어 33시간의 비행이 마무리되는 듯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착륙하기 전에 벌써 흐린 하늘에 비행기 창문에도 빗방울이 흩어진다. 어떻게 왔는데, 오자마자 비가 내리다니. 실망에 젖기도 잠시, 드디어 나는 아르헨티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비행기에서 내린다. 아직 내가 아르헨티나에 왔다는 사실을 믿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무사히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가니 날씨도 덥고 비도 내려서 덥고 습한 기분에 짜증이 밀어 올라온다. 화장실에서 옷을 간단히 갈아입고, 아르헨티나 페소가 필요해 환전을 하려니 줄이 어마어마하고, ATM에서는 영 먹히지 않는 내 카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끝에 결국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공항을 나선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 속에 어쩔 수 없이 우비를 꺼낸다. 우비 입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설마 있다 하더라도, 그게 도착하자마자 꺼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항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선다. 비가 내리는 탓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듯하여 설레는 기분을 억누르고 싶진 않다.
'가자마자 옷 좀 갈아 입고, 세수도 좀 하고, 면도도 해야겠다.'
33시간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탓에 씻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솟구친다. 그렇게 궂은 날씨 속에서 찝찝한 기분을 애써 달래며, 먼저 도착한 동행이 있는, 에어비앤비 어느 아파트로 향한다.
배너 사진은 상파울루 공항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