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은 EATFLIX 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니까
90년대생 여자, 3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신입사원의 첫 휴가는 왠지 특별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손으로 번 돈으로 가는 첫 휴가이니 되도록 팬시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코로나로 발이 묶여 떠날 수조차 없는 지금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첫 휴가 때 유럽에 가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극치에 달하는 곳에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한 곳이 바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다(자본주의의 극치라면서 왜 뉴욕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냐고? 그냥,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허세였다).
일정을 잡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휴가 어디로 가?”라는 물음에 “샌프란시스코요!”라고 대답할 때마다 짜릿했다. 죽여주게 내리쬐는 햇살에 못 이겨 일어나 금문교에서 조깅하고,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케이블카를 지겹다는 눈빛으로 무심하게 지나쳐 테라스에 앉아 필즈커피를 마시는 내가 그려져 굳이 계획은 안 세웠다. 휴가에 대한 기대보다 ‘샌프란시스코로 휴가 가는 나’에 잔뜩 취했다. 일이 힘들어도 ‘샌프란의 나’를 생각하면 행복하고 힘이 좀 났다. 아직 첫 휴가도 다녀오지 않은 신입사원은 ‘이 맛에 휴가 가는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휴가가 시작됐다. 상상 속에서는 샌프란 이곳저곳을 누볐으나, 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고 침대에 눕자 밖으로 나가기 싫어졌다. 긴 비행 탓이라기엔 너무 오래 그렇게 있었다. 미국에만 공개된 넷플릭스 예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버 잇츠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숙소 근처에 유난히 많은 체육관 탓이었을까. 굳이 13시간을 날아 집에도 있는 침대에 누워 집 앞에도 있는 체육관에 다니며 여행의 절반을 보냈다.
에어비앤비가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내 방 침대에서는 볼 수 없는 <테라스하우스> 에피소드도, 우리 집까지 배달할 수 없는 치폴레도 ‘살아보는 것’이니까 괜찮다면서, 누워서 샌프란 영화도 두 개나 봤으니 충분히 여행한 거라면서. 그래도 시트콤 <미란다>처럼 태국으로 휴가 간다고 거짓말하고 집 앞 호텔에서 며칠을 숨어 지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며 아주 만족했다.
내 휴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러려고 미국까지 갔냐”고 했지만, 맞다. 유성매직으로 휘갈긴 획은 다시 지울 수 없어 종이를 버린다. 종이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틀린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이 나의 휴가니까!
휴가까지 떠나서도 꼭 보고 싶은 명작들
낭만적인 제목에 그렇지 못한 이야기를, 인생은 원래 아이러니한 것이니까 <와이키키 브라더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를 때면 <노매드랜드>
낭비하듯 써버린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첫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찬실이는 복도 많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서울에서까지 찾아낸 휴가지의 맛들
여행하는 10일 중 7일을 먹었던 <치폴레>의 맛이 생각나는 <쿠차라>
가장 좋아했던 미션 스트릿에서 먹었던 어느 타코집이 생각나는 삼성동 <비야 게레로>
숙소 앞에 있어서 매일 아침 먹었던 <팜 테이블>은 비슷한 맛을 찾지 못했다. 말차라떼가 끝내준다.
80년대생 남자, 11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아아, 오늘부터 한 달간 여름방학이 시작됩니다. 회사에 나올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고, 업무와 관련된 모든 것은 한 달 뒤로 미뤄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일 없겠지만, 몰래 회사일 비슷한 걸 했다간 강력한 징계 조치가 취해질 예정이니 이점 유의하시고. 긴 방학 여유로울 수 있게 보다 많은 월급을 드리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방학 보내고 한 달 뒤에 만나요!”라는 말은 올해도 듣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듣지 못할 수도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 숙제로 냈을 상상화를 떠올린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바다 밑에 도시가 있고 로봇이 힘든 일을 대신하고 뭐 그런.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면 1년에 한 번 여름방학을 즐기는 어른들을 그릴 것이다. 이게 진짜 미래고, 혁신이다. 성실한 어른들에게 열흘 남짓한 휴가는 너무 짧다.
작가 김연수는 말했다.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그의 말처럼 혹시라도 긴 여름에 방학이 주어진다면 내가 사는 이 동네의 생활을 마음껏 즐길 것이다. 타인을 위해 혹은 새로운 경험을 위함이 아닌 오로지 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둘러싼 공간과 물건, 음식들과 함께 방학을 보낼 것이다. 밥벌이하느라 소홀했던 이곳에서 말이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을 자고 깨고, 자전거를 빌려 몰랐던 동네 구석을 발견하고, 또 어떤 날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동네 작은 가게에서 저녁을 보내고, 좋아하는 책을 보고,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전시를 챙기고. 전혀 화려하지 않은 그런 휴가, 그런 삼십 일의 방학을 보내고 싶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멋진 풍경도, 처음 맛보는 음식도, 짜릿한 모험도 아닌 그저 여유롭게 천천히 흘러 조금 남는 시간이다. 혹시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이 마음 대신하여 <여름방학>을 다시 돌려본다.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혹평 일색이었던 예능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모두 들어있다. 정유미와 최우식은 특별히 하는 게 없다. 밥을 지어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다. 제철 과일로 식사를 챙겨 먹고, 집 앞 바닷가에 나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해 먹고, 산에 오르고, 가끔 친구들을 불러 밤을 지새우고. 특별한 것은 없지만 뜨거운 계절에 조용하게 흘러가는 누군가의 시간이 있다.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새콤달콤한 아오리사과를 베어 물고 잘 삶은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뜯어먹으면서 말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떠날 곳을 찾고, 낯선 곳에서 생경한 것들을 마주하고, 바빠서 잠시 잊었던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가는 휴가도 좋다. 매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기 전 의식을 치르듯 휴가를 보냈었다. 의미도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쌓은 좋은 기억들이 힘든 시절을 견디게 했다. 그러나 쉽게 떠날 수 없고 자유롭게 즐길 수 없는 쉽지 않은 시대를 보내며 휴가와 휴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멀리 떠날 순 없어도, 영원히 여름방학이 없을지라도 늘 잘 먹고 잘 보는 훌륭한 어른이 되길 바라며.
가질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지. 여름방학
어린 시절 보낸 여름방학을 아름답게 포장한다면 이 정도 느낌이 아닐까 싶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애니메이션 말고, 옛날 영화를 보세요!) <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
책의 절반은 여름을 묘사하는데 할애한 거 같다.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여름이고, 아마도 어른이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물론 그들은 일하는 중이긴 하지만)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여름 날씨가 미쳤다고 생각할 때, 이 영화를 보면서 날씨를 왜곡시켜보자.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는 덤. < 콜미바이유어네임 >
여름방학엔, 매일 매일 과식하면 좋은 것들
딱복이든 말복이든 무엇이든, 먹고보자. 여름이 지나 복숭아가 싱거워지기 전에. <복숭아>
여름엔 냉면은 좀 식상할지도 모르지만. 식상할만큼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점심엔 평양냉면을 먹자. 어젯밤 과음한 사람도, 그냥 배가 고픈 사람도. 유진식당에서 소주랑 같이 냉면을 마시자. <평양냉면>
한 여름 밤, 쏘아 올린 불꽃을 보며 어른답게 얼음 세 알 띄워 이 와인을 마시자. 그라함도 좋지만 코스트코에도 훌륭한 와인이 있다. <포트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