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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레순 Nov 09. 2021

시와 함께 EATFLIX

날이 추워서 시집을 꺼내 입었다. 시-월엔 시-를 읽어야 하니까!


우리를 위로하는

지나치는 말들

팔십 년대 생. 남자. 십일 년 차 회사원의 EATFLIX.


'힘내'라고 말하면 정말 힘이 날까?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꼭 잡고,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진심이 모두 전해질까? 함게 눈물을 쏟아내면, 그가 짊어진 마음의 무게도 함께 흘러가 버릴까? 와하하 웃으며 별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이 되려 힘이 될까? 여러 번 반복된 말들에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을까? '괜찮다'라는 말은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가볍거나 무겁거나 사람을 위로해야 할 일들은 많아졌지만, 어떤 말이 위로가 될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누군가를 제대로 잘 위로하는 매뉴얼이 따로 있거나, 진짜 완벽한 위로의 이모티콘이 등장해서 사랑이나 감사, 미안이나 분노의 마음처럼 쉽게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위로가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은, 또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고, 부족하거나 지나치치 않은 적당한 상태로 잘 전해져, 누군가의 아픈 마음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졌으면 좋겠으니까.


좋아하는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 그곳에서 김혜자는 얼떨결에 백화점 VIP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인회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을 주제로 시를 짓기로 한다. 과제를 위해 그동안 들었던 기억에 남는 말을 생각하는데, 대체로 상처가 되거나, 화가 되었던 날카로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히 어린시절 알고 지내던 오빠를 만나게 되고,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의 처지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작은 가게를 내볼까, 월세를 받는 상가를 살까 생각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오빠는 혜자에게 묻는다 "돈은 있니?" 이 말을 듣고 조용히 커피만 마시다 집에 오는 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돈은 있니라는 말에 나는 하마터면 울 뻔 했습니다. 울컷 마음이 뜨거워져서. 힘들게 사는 거 다 보였나 싶으면서도 이 사람 꽤 나를 많이 생각해주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힘들거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왜 같이 사는 식구조차 내 주머니에 돈이 말라 힘들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걸까요? 드라마나 소설 속 아름다운 얘기에 나오는 여자들을 보면서 나는 항상 그녀들의 가계부가 궁금했습니다.어떻게 얼마를 벌어서 어떻게 얼마를 쓰고 사는지 그 아름다운 얘기에 그 얘기가 쏙 빠져있어 왠지 인형놀이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돈은 있냐는 당신의 그 말 한마디에 난 벌써 위로를 받았습니다. 힘을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동적인 한마디를 떠올려야하는 이 시점에, 당신을 만나 내게 감동적인 한마디를 던져주고 가셨습니다. 난 아마 이 글을 발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동네에서 이런 글은 이해 받지 못할테니까요. 그저 나만이 아는 내 인생의 한마디. 돈은 있니?"


진심은 준비되지 않은 지나치는 말에 있다. 그 말은 아주 자연스럽고, 따뜻해서 사람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 그를 위로하고, 감동을 준다. 돈은 있니라는 별거 아닌 말과 밥은 먹고다니냐라는 매일 듣는 말처럼 특별하지 않아서 놓치기 쉬운 말들에 감정을 담아 적어내려간 시 몇편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집.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류시화의 하이꾸 읽기>

매일 오는 계절이, 특별할 것 없는 자연이 나의 오늘을 이렇게 따뜻하게 바꾸는 한 줄의 시들이 모였다. 모든 시들이 좋아서 접히 않은 장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건 "추워도 불 가까이 가지마, 눈사람"


<시가 뭐고?: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89명의 할머니들이 시를 썼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멋진 문장들로 가득한 시가 아니라 할머니들의 하루 또는 인생이 날것으로 시가 됐다. 별 거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지 읽어보면 안다. 문식이 할머니랑 박금분 할머니의 시를 보며 훌쩍.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좋아하는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쓴 박준 시인의 시집. 언젠가 나도 겪었을 것 같은 시절을 읽으며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된다. 희망소비자가격이 그렇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밥집.

사랑방 칼국수_백숙백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치킨스톡이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여기 닭국물일 거다. 따뜻한 국물과 닭고기와 밥과 김치를 함께 즐기면 닭국물의 온도만큼 우리의 마음도 따뜻해져있을 것이다.


돈까스백반_돈까스백반

무려 돈까스가 무한리필인데, 성인 남자 2명이 가도 한번 리필이 최대치이다. 소스가 특이하고 함께 차려지는 반찬과 된장찌개와 미역국도 아주 맛있다. 엄마한테 속아서 병원가기 전 혹은 후에 먹은 그 돈까스만큼 다큰 어른을 토닥여 줄 것이다.


주유소식당_낙지백반

스뎅그릇에 담긴 흰쌀 밥에 매콤달콤한 낙지볶음이 얹어지는 것만으로도, 다치고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을지도. 집밥이라고 포장된 노포 특유의 감성도 있고.


특별히 힘든 건 없지만, 그래도 위로 받고 싶은 날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따뜻하게 감싸는 건 서툴면서 누군가 나를 토닥여줬으면 하는 날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처럼 그렇게 해줄 사람이 없어도 알아서 잘 먹고, 잘 보면서 좋은 어른이 되자!



나는 시가 좋은데 싫다

구십 년대 생. 여자. 삼 년 차 회사원의 EATFLIX.


내 방 책장의 한층은 시집으로 빼곡히 차 있다. 이 사실을 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문예창작을 공부했다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유난히 시에 조예가 깊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시 몇편을 읊을 줄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주 큰 오해다. 나는 국어교육을 전공했고, 전공 수업 중 현대 시문학의 성적은 재수강을 해도 B-를 받았더랬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에 새로 산 시집 서너 권의 사진을 찍어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 시집을 산다는 것은 대체로 시집을 산다기보다 그것의 제목을 사는 것과 같다."


내 책장에 시집이 한층이나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부터 시집을 사고자 서점에 들어섰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신논현역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갑자기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을 때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렀던 교보문고에서 벌써 다섯바퀴나 서점을 돌았는데도 친구가 안 와서 주저 앉아 쉬었던 곳이 하필이면 시 코너였어서, 혹은 읽고 싶었던 에세이를 사려고 접속한 예스이십사에서 "이 책을 사신 분들이 이 책도 샀어요"라면서 추천해주는 바람에, 시집들을 만났다. 그것들은 화려한 색깔과 더불어 현혹적인 제목들로 나를 잡아 끌기 일쑤였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우연히 만난 멋지고 낯선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져서 산 시집의 제목들 중 일부다. 애석하게도, 이 시집들 중 단 한권도 완독을 한 것이 없다. (시집에도 완독이라는 것이 있는 건가, 알 수가 없다.. 나는 현대시 수업 재수강 B-인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시집 구매가 100퍼센트 전시 목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시하기에는 참 좋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대충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커피랑 같이 찍어 올리면 얼마나 멋져 보이는가??) 늘 열심히 읽어보려 애쓰기도 하는데, 종종 실패하고 가끔 성공한다. 내가 좋아하는 S라는 동료는 행복할 때는 인스타를 하고, 외로울 때만 시를 읽는다고 했는데, 나 역시도 그랬다. (이 말을 한 글이 실린 책을 구매할 수 있는 링크를 달려고 했는데 그 링크의 출처인 S의 인스타그램이 닫혀서 첨부에 실패했다.) 내가 이해하고 좋아하게 된 시는 전부 아주 외로울 때, 슬플 때, 괴로울 때 읽었던 것이다.


오늘은 그래서, 외로울 때, 슬플 때, 괴로울 때 읽고 먹었던 것들의 일부를 소개하기로 했다.


체할 것만 같이 삶이 부대껴올 때 침착하게 속을 내려줄, 

구반포 스마일포차의 묵은지 닭볶음탕에 소주 한병을 마시며-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천양희, 밥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중

** 12월부터는 이수역으로 이전하여 영업 예정이라고 합니다..


들키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른 채 지나가는 것도 괜히 씁쓸했던 짝사랑을 쫑냈을 때,

해방촌 요코스카쓰나미의 사시미에 동해 소주 한병을 비우며-

네가 나를 선한 사람에
끼워주기를 바랐지만
막상 네가 나더러 선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 게 되고 싶었어. 이를테면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로 인해서,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걸
기억력이 좋은 네가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얼쩡거렸지.

- 김승일, 나의 자랑 이랑 <에듀케이션> 중


마지막으로,

시를 덜 무서워하게 해준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

반복되는 운율 속의 변주 같은 패터슨의 '시적인 삶'을 따라가다보면, 패터슨이 스스로를 끝까지 시인이라 칭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늘 난해한 줄만 알았던 '시'라는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빈 공간은 최고의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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