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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레순 Oct 01. 2021

권태로운 EATFLIX

9월엔 그냥 다 싫어서 조금 늦었어. 그러면 안될까?


질리도록 지겨워도

구십 년대 생. 여자. 삼 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친구와 을지로에 있는데 근처에 있던 다른 친구가 같이 밥 먹는 것 어떠냐고 해서 셋이 만났다. 나를 뺀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인스타그램에서, 또는 나를 통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대충 아는 편이었다. 내 친구들끼리의 만남은 자주 있었지만 술 없이 대낮에 밥을 먹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어서, 나는 괜히 걱정을 했는데, 정말 괜한 걱정이었다. 처음 만난 둘이서 어색함 하나 없이 서로에 대해 아주 개인적인 부분까지도 아주 적극적으로 묻고 답하는 게 아닌가.


그 신기한 광경을 보며 내가 물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처음 본 사람에 대해 궁금할 수가 있어?"

"서로 잘 모르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 그게 당연하다고??"


나는 낯선 이를 만날 때면 내 이야기를 하느라 너무 바쁘다. 그 사람을 알려는 의지보다 나에게 그 사람을 알리고 싶은 욕망이 늘 앞서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기심과 더불어 혹시나 상대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억측 내지는 과한 배려심에서 기인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늘 가장 빨리 질리는 사람이 된다. 이제는 종종 스스로에게까지 권태를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나를 어떤 선배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굳이 처음부터 너를 다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어."

그가 말하길, 인간의 매력이란 '알아가는 중'에서 오는 거랬다. 


이럴수가.. 저는 너무 급한데요? 그냥 처음부터 다 빨리 알아버리고 싶은데요? 남들도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처음 만나자마자 안 물어본 TMI를 막 말하는 건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조용히 생각을 해봤다. 나는 누군가를 의식적으로 '알아간 적'이 있었나? 없었다. 헐 너에게 이런 모습이? 했던 적은 많았지만 의식적으로 알기 위한 노력에서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많은 것들에 쉽게 권태를 느끼는 것이 변덕스러운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시작이 달라지면 권태도 덜 느끼지 않으려나,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쉽게 지겨워지는 것이 뭐가 나쁜가 싶다. 권태라는 것도 애정이 있어서 느낄 수 있는 거고, 권태를 쉽게 느끼기 때문에 익숙함을 깨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이 태어나는 거니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맥주를 까면서 생각한다. 질리도록 지겨워도 나를 계속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아 이러한 패턴의 결론마저 정말 지겹다 나란 사람..)


지겹도록 보아도 질리지 않는

9월이 가기 전에 안 보면 큰일나는 영화 <9월이 지나면> 배우 조현철의 기타 연주가 좋아서 똑같이 따라 치려고 기타를 배웠고, Green Day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는 지금도 악보 없이 칠 줄 아는 유일한 곡이다! https://youtu.be/HAmJCTymF5U


질리도록 먹어도 지겹지 않은

이태원 <쟈니덤플링> 만약에 여기 군만두를 줬다면 <올드보이>의 오대수도 탈출하려는 의지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끓인 <불닭게티> 짜파구리보다 더 맛있다. 어디 놀러가면 내가 꼭 친구들에게 끼려주는 것인데, 이걸 끼리면 입 짧은 친구도, 깡마른 친구도, 배터질 것 같다며 숟가락을 내려놓은 친구도 식신 들린 것처럼 먹는다.



권태기지만,

잉태기라 믿으며.

팔십 년대 생. 남자. 십일 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일과 사랑에 왜 권태가 오는가. 함께한 시간이 질리도록 오래되어서?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감정이 예전 같지 않아서? 새로움이 필요해서? 다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순서대로일 수도 있고, 하나만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권태가 오는 수많은 이유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일과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맥주 광고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라고 지금 뭐라도 빨리 시작하라고 했다. 그 이후로 맥주를 딸 때마다 생각한다. "시원하기만 한 멍청한 맥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가끔 얼마나 좋은지 알지도 못하는 맥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후회나 고민, 그리고 이 권태까지 절대 생길 리 없는데. 그냥 마른 목이나 채울 것이지. 건방진 녀석..." 사실상 우리가 권태를 피해 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일이 하나 있다. 권태를 느끼지 않기 위해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은 방법인데, 절대로 권태를 느끼지 않는 행동이 바로 시작, 그리고 시작하기 전까지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나는 얼마나 성실한 인간이며, 앞으로 얼마나 멋지고 새로워질지. 물론 시작과 함께 와르르 무너지고, 작심삼일은 커녕 이틀 만에 권태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사람이 그렇다. 아니 이러니까 사람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권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다시 약동하기까지의 공백이라고. 그래 뭘 특별히 이뤄낸 것은 없지만, 이제부터 권태기를 잉태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새로움을 위한 공백. 이때는 가만히 앉아서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새로운 마음이 뿅 하고 나타날 것이고, 그 마음을 붙잡고 즐겁게 시작을 준비하다 보면 우리의 삶은 다시 즐거워질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또 권태로운 마음이 드는 날이 올 것이고, 그땐 또 다른 무언가를 잉태하는 시간을 가지면 될 것이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권태로운 시절을 괴로워하지 말자. 기다리다 보면 뭐라도 될 테니까. 목표 좀 못 이뤄내고, 계획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좀 어때라는 마음으로. 9월도 EAT-FLIX


권태로운 날에 봄,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구나. 그런데 사람 사는 거 참 다양하구나.라고 느낀다. 비슷한 시절을 겪으며 또 다른 방법으로 답을 찾아가니까.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잘 나가는 감독이 된 것도, 아마 이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뒤에서 총을 쏘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하지 않을 '히치하이킹'을 한 네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 영상 속에서 메일이 왔을 때 나도 모르게 우왓! 했다.


싱스트릿

진짜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것이 권태로운 시절을 버티는 유일한 미덕이다. 아주 순수하고 열정적인 이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너는 나의 봄

상처 받은 서른 넘은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설렌다. 이걸 보고 나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반드시.

<근데 일단 이번 달엔 스우파먼저 보자> 


권태로운 날에 먹어 봄,

알래스카 그래이프

이런 포도는 없다. 만리동 어느 술집에 가면 포도를 얼려서 이렇게 판다. 추석 때 샤인머스캣을 많이 받았다면, 몇 송이 얼려서 독한 술과 함께 먹어보자. 이 시절 지겨운 포도를 좀 다르게 즐길 수도.


유엔가든 손차돌박이

3초면 후루룩 익어버리는, 그만큼 쉽게 물리는 차돌박이를 좀 다르게 먹어보고 싶다면, 손으로 두툼하게 썬 차돌박이가 있는 유엔가든에 가자! 


고기리 막국수

요즘 인기 들기름 막국수. 이 맛은 마치 평양냉면과 같아서 아 이게 뭐야 하다가 아 이게 그거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족발집에서 딸려오는 권태로운 막국수 대신 고기리에서 들기름 막국수를 먹으며, 이 시절을 보다 담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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