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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레순 Nov 24. 2021

망한 EATFLIX

초심을 잃은 우리를 위하여

초심의 기원

90년대생 여자, 3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세상 모든 시작에는 초심이 있다. 단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로 가기에는 너무나도 설레거나 혹은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 길은 너무나 멀기 때문에 초심을 짊어지고 가다가 때로는 내려놓기도 하고, 혹은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초심은 크고 무겁지 않을수록 좋다. 하지만 초심은 사실, ‘처음’이라는 허울 좋은 옷을 입은 욕심일 뿐이라서 대체로 아주 무겁다(적어도 나의 경우엔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


초심 없는 시작을 할 수는 없을까 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초심을 업고 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지는 순간, 그걸 버리게 될 때의 죄책감을 오로지 나 혼자서 겪어야 하는 것이 더욱 괴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심을 갖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어찌 됐든 시작을 할 때 갖는 처음의 마음이기에 초심이라는 아이러니라는 것.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초심을 가진 적도 있었더랬다.


초심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망한 것은 아니란 걸 안다. 포기는 또 다른 초심을 낳으니까, 잃어버린 초심의 빈자리에 새로운 초심을 욱여넣으면 된다. 어렸을 때는 망했다 싶으면 도망친 적도 많은데 이제 나는 어엿한 3년 차 사회인이 되어버린 탓에 망했다고 해서 도망칠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망하면 망한 채로 달릴 수 있다. 어차피 망한 거 그냥 대충 어디까지든 달려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초심에 대해 얼렁뚱땅 개똥철학을 의미 없이 늘어놓는 이유는 이 글은 올해 나의 EATFLIX 프로젝트에 대한 초심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성문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미루고, 늦고, 이번 달은 건너뛸까? 생각까지 하면서 뻔뻔하게도 이번 달의 주제를 ‘망한 잇플릭스’라고 정했다. 하지만 주제를 정할 때의 초심은 또 사라져서 말 그대로 정말 ‘망한 글’이 됐다. 하지만 본분은 다하는 어른이니까, 어차피 글도 망한 거, 지인짜 맛있고 재밌는 거나 추천해 버리겠다!


<내일 지구가 망한다면 먹고 싶은>

① 을지로 <철철복집> 복불고기와 복고니

지갑에서 피가 철철 난다고 해서 이름이 철철복집. 한 점씩 구워주시는 복불고기의 매큰한 맛을 즐기다 보면 호일에 가려진 고소하고 말캉한 고니가 소주로 절여진 속을 포근하게 안아준다.

② 연희동 <연희미식> 오징어튀김

모든 메뉴가 다 맛있지만 오징어튀김은 두 개씩 시켜야 한다. 이름은 오징어튀김이지만 바삭바삭하고 맵지 않은 건고추가 그야말로 미쳤으니 꼭 먹을 것.

③ 신촌 <여수집> 문어숙회

노포 맛집 유튜버 ‘김사원세끼’가 강추한 신촌의 술집. 무한 리필 귤과 함께 인천 출신 여수집 사장님이 손수 썰어주는 문어 해체쇼까지 세트로 즐겨 보자(혹시 사장님 여수 출신이신가요? 라고 묻는다면 김사원세끼 보고 왔냐고 하신다).


<모든 계획이 망가져도 보고 싶은>

웨이브 오리지널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밑도 끝도 없이 망가지는 상황이 단 하나도 수습되지 않은 채로 전개되는 극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답답함보다 통쾌함이 느껴진다.

윤성호 감독의 <두근두근 시국선언>

감독의 어머니가 실제 상황이 유출됐다 생각해 걱정했다는 명작. 카메라 이동 없이 대사만으로 웃길 수 있는 윤성호만의 위력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왓챠 <콩트가 시작된다>

말 그대로 정말 ‘망한’ 청년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초심을 잃는다고 해서 꼭 망한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분명히 망했지만 완벽히 망하진 않았다

80년대생 남자, 11년 차 회사원의 EATFLIX 


나는 자주 망한다. ‘귀찮음’이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계획하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오늘까지만, 그리고 내일부터”가 인생의 모토인 사람처럼 오늘 해야 하는 일들을 내일부터로 바꾸고, 오늘까지만 대충 살고, 내일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많은 오늘을 살아간다. 이 원고도 오늘, 아니 어제 썼어야 했는데 오늘 쓰고 있고, 마음 같아선 내일로 미루고 싶다. 그렇게 나의 한 해는 대체로 망한 하루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 하루들이 모여 2021년이 됐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볼 거 없이 올해의 계획과 다짐들 역시 분명히 망했다.


그러나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진 못했지만 적잖이 밥벌이는 하고 있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진 못했으나 부끄러운 사람이 된 건 아니고. 많은 돈을 벌진 못했지만... 아 많은 돈을 벌진 못했지... 어쨌거나 망한 오늘을 보내고 내일은 또 오고, 계획한 것을 지키지 못한 나에게도 새로운 한 해는 온다. 그래서 또 망쳐버릴진 몰라도 일단은 다소 설레고 희망적이게 ‘내일부터’를 다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완벽히 망하진 않았다.


분명히 망한 것 같은데 완벽히 망하진 않은. 오늘을 버리고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시절, 연말이 왔다. 끝나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기대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한 두 달을 대충 보낼 수 있는 시기. 이럴 때야 말로 실컷 먹고 놀고 보는 절호의 찬스다. 잃었던 초심은 내년부터 되찾으면 되니까. 보다 즐겁고 희망적인 내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본다. 고다르의 영화가 아니라 윤성호 감독의 영화 혹은 TV 시트콤이다. 진짜 특이한 그레이트혁권과 그의 매니저 재민의 이야기. 제대로 된 사람과 하루는 없지만 즐겁고 유쾌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오늘이 아니라 내일까지 망쳐버려도 상관없겠다 싶을 만큼 재밌다. 그들도 이토록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살아가는데, 우리의 망한 하루 혹은 한 해쯤 어때? 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마지막화에서 전처의 전화를 받으며 재민을 위로하는 알바생 희본은 ‘우주가 무한한 것 같지만 실은 유한하다. 150억 년 전에 그 어떤 무언가가 폭발하면서 태어났으니. 150억 년만 기다리면 모든 헤어졌던 만물이 결국 다시 만난다는’ 헛소리를 한다. 150억 년의 시간이 지나면 만물은 만나게 된다. 사람도 내가 계획했던 날도. 그러니 망했거나 망해가는 날을 슬퍼하지 말고 마음껏 맛있는 걸 먹고 재밌는 것들을 보자.

<망한 하루도 괜찮다 말해주는 것들>

① 토마토 치즈 케이크

토마토는 그냥 먹는 게 좋다지만 뭘 넣어서 먹는 건 더 좋다. 토마토 속에 바질치즈를 가득 채워 향긋하고 달콤하게 오늘은 좀 망해도 괜찮다 말한다.

② 스마일카레

평범한 카레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다. 먹기도 전에 우와! 하고 기분이 좋아지니까. 어떻게든 웃고 나면 망한 하루도 절반은 성공인 셈이다.



<망한 하루에 희망을 주는 것들>

<미스 리틀 선샤인>

망해 보이는 콩가루 집안의 막내딸 올리브, 미인대회에 나가는 것이 꿈이지만 평범한 외모에 통통한 몸매다. 이 어린 소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며 펼쳐지는 이야기. 내년부터는 올리브처럼 살자.

<청담동 살아요>

망했지만 내 마음속에 망하지 않은 시트콤. 실제로 망한 혹은 망해 보이는 가족이 우연히 청담동 한 빌라에 살게 되는 이야기. 내년부터는 김혜자 같은 사람과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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