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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책을 읽다 16화

여보게, 다윈이 아니고 크로포토킨일세!

저 시절이나 이 시절이나 어슷비슷한 게 조금도 차이가 없다.

by 휴헌 간호윤

2021년 12월 16일, 2년 여를 코로나가 전 세계를 몰아친다. 그래,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 해의 마지막을 넘는다. 그러나 그 끝자락은 보이지 않는다. 아래는 13년 전에 써 놓은 글이다. 그런데 저 시절이나 이 시절이나 어슷비슷한 게 조금도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가 없다. 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는 '늘 코로나의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



<여보게, 다윈이 아니고 크로포토킨일세!>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구의 글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생존경쟁’이라는 절대적 어휘가 어깨에 힘을 딱 준 이 시절에 새겨들을 만하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마침 식사시간이었단다. 먼저 지옥부터.

모두 겸상을 하고 앉았는데, 아! 제 팔보다도 훨씬 긴 젓가락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입 안에 넣자니 들어갈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한 번 떨어뜨린 음식은 다시 집어먹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 사람들은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아우성만 쳐댔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런 몸부림을 볼 수 없었다. 식사 규칙도, 젓가락 길이도 똑같았으나 여기서는 배불리 들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젓가락으로 집은 음식을 자기 입에 넣으려 하지 않고, 마주 앉은 사람의 입에다 서로 넣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엊그제 한 신문에 <탄생 200주년 기념/다윈이 돌아왔다>라는 제하의 시리즈를 보았다. ‘생존경쟁(生存競爭:struggle for existence)’의 태두로서 다윈에 대한 예우는 20포인트는 됨직한 검은 활자로 박힌 “경제는 균형이 아니라 진화”라는 타이틀 기사에서도 알 수 있다. (아래쪽을 보니 무려 열 번하고도 한 번을 더 연재한단다. ‘(1) 21세기에 되살아나는 다윈’으로부터 시작하여 ‘(11) 다윈과 의학’으로 맺는다고 되어있다.) 소제목은 ‘균형에 관한 헛된 믿음을 버려라’, ‘경제는 두려움 때문에 진화한다’ 따위로 다윈의 진화론을 경제와 연결시켰다. 기사의 한 부분이다.


다윈은 변이와 선별, 이 두 가지 간단한 개념의 결합을 통해 진화의 메커니즘을 밝혔다. 비록 다윈은 자신의 개념을 생물의 진화에 적용하였지만 이 원리는 생물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개념을 확장하면 세계 보편의 변화 원리가 될 수 있으며 경제에도 훌륭히 적용될 수 있다. 《부의 기원》(2007)을 쓴 바인하커(E. Beinhocker)는 진화야말로 “세계의 모든 질서, 복잡성, 그리고 다양성을 설명해 주는 공식“이라고 하였다.


다윈, 진화의 메커니즘으로서의 경쟁, 경제, 부를 한 동선으로 그린다. 아마도 21세기의 이 난세(亂世)의 비상구를 ‘생존경쟁’ 이론으로 찾자는 의도인 듯하다. 하지만 다윈 운운은 영 마뜩잖다. 자본주의 경제의 배필격인 ‘경쟁’이 다윈 이론의 핵심 용어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다윈 이론의 ‘경쟁’은 생물의 진화에 적용해서였다.


또 경쟁을 부추기는 원인인 경제(經濟, economy)라는 말도 찬찬히 뜯어보면, 그리 경쟁적이지도 않다. 경제를 구성하는 ‘eco’는 더불어 산다는 ecological(생태적)이요, ‘nomy’는 그리스어 nomos(인간의 규범)가 합해 된 말 아니던가. 그러니 경제란 '생태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사실 오늘날 경기침체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 간 서로 제휴를 하는 ‘콜래보노믹스(Collabonomics)’ 또한 상생 아닌가.


더욱이 다윈의 ‘생존경쟁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이요, 가설’일 뿐이라는 점이다. 다윈이 1858년 런던 린네학회에서 진화론을 발표한 지, 그래 세계적으로 다윈 추종자들을 만들어낸 지 반 세기쯤 러시아 출신 동물학자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는 다윈의 이론을 실증적으로 증명해 보려 했다.


크로포토킨의 연구는 철저히 야생에서 시작되었다. 다윈의 이론처럼 생물이 과연 ‘동종 또는 이종동물과 끊임없이 경쟁을 통해 생존’을 하느냐를 규명할 심사였다. 크로포트킨은 개미, 꿀벌 따위 작은 곤충에서부터 조류 따위를 거쳐 인간으로 시선을 옮겨, 야만인, 미개인, 중세도시인, 근대인까지 영역을 넓히며 철저한 실증적 작업을 한다. 첫 결과물을 1890년 내놓고도 연구는 1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13년 뒤인 1902년, 크로포토킨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A Factor of Evolution)》를 완성시킨다.


학계에서는 이 책에 실린 크로포토킨의 주장을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이라고 부른다. ‘상호부조론’은 ‘사회 진화의 근본 동력이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인 협동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른바 ‘생존경쟁’을 전면에 내세운 다위니즘과는 대척점에 선다. 크로포토킨의 연구에는 다윈이 주장한, 아니 실은 다윈주위자들이 주장한 것이겠지만(다윈은 항상 생존경쟁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동종 간의 치열한 경쟁이 생존경쟁의 특징이자 진화의 주요인이란 결과가 없었다.


크로포토킨은 한 지역에서도 다윈의 이론을 입증하는 결과를 찾지 못하였다. 오히려 ‘격렬한 경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따위 파르스름한 냉기를 뒤덮은 시기에는 종의 진화가 없었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생존을 위해 벌이는 무자비한 싸움터는 오히려 공망(公亡) 뿐이라는 결과였다. 크로포토킨이 찾은 자연법칙은 상호투쟁이 아닌 ‘상호부조’였다. 서로 돕는 상호부조야말로 진화의 동력이요, 진정한 생존경쟁이었다. 크로포토킨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에 작은 곤충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찾은 예들을 낱낱이 적어 놓았다.


크로포토킨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들을 위해 루이빌 대학의 교수인 진화생물학자 리 듀거킨(Lee A. Dugatkin)의 《동물들의 사회생활》(장석봉 역, 지호출판사, 2000)을 추천한다. 이 책은 진화론에서 본 동물들의 협동에 대한 독특한 실험 보고서이다. 리 듀거킨의 보고에 따르면 흡혈박쥐는 40시간 동안 피를 공급받지 못하면 죽는데, 옆에 이렇게 죽어가는 동료가 있으면 흡혈박쥐들은 자기 피를 토해 나눠 준다고 한다. 또 몽구스는 부모가 외출하면 집에 남아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적을 보면 자기는 먹힐지언정 소리를 질러 무리를 대피시키는 땅다람쥐, 침입자를 쏘고 장렬하게 죽는 벌, 무리를 위해 뜨거운 사막을 돌아다니기를 마다하지 않는 여왕개미들의 희생정신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생존경쟁이라는 것과는 생판 다른 이러한 현상을 ‘경쟁’이라는 금속성 어휘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다윈의 친구 토마스 헉슬리, 그는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자연”이라는 폭력성 발언을 퍼부으며 ‘동물 세계에서 협동은 저주’라고 했다는데, 아마도 그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성급한 결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2008년의 어둠의 자락을 끌고 들어 선 2009년 1월이 중턱을 넘어선다. 자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절망’, ‘좌절’, ‘암담’ 이란 부정적 용어를 듣는다. 그래, 아마도 저 신문에서는 이 고통을 벗고자 다위니즘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듯하다. 허나 야박한 ‘생존경쟁’으로 살 자가 몇이나 될지 참 의문이다. 물론 저 신문이나 저러한 글을 쓰는 분네 들이야 ‘경쟁’을 할수록 더욱 힘이 솟겠지만. 나는 생존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서인지, 무한경쟁은 끝없는 소모전이란 생각뿐이다. 그래, 서로 조금씩 부축해 주는 인정머리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예로부터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도왔다. 향약, 두레는 어려움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상호부조의 정신을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저 IMF 때의 금 모으기 또한 서로 도와주어야 생존한다는 상호부조의 실례가 아니겠는가.


삶에 겨운 친구 녀석이 있다. 열심히 사는데도 늘 생활이 도긴 개긴이다. 엊그제 통화를 했는데 사는 게 아주 죽을 맛이란다. 오늘은 그 녀석을 불러내야겠다. 그래 소주 한잔 하며 이렇게 말하련다.


‘여보게, 다윈이 아니고 크로포토킨일세!’


이 글을 쓰는데 크로포토킨 지음, 김영범 옮김, 《만물은 서로 돕는다》, 르네상스, 2005를 참조하였다.


콜래보노믹스: 협력을 뜻하는 ‘콜래보레이션(Collaboration)’과 ‘이코노믹스(Economics)’를 합친 신조어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기업 간 협력이 강조되면서 학계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1+1=2’가 아니라 3이나 4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상생의 경제학’을 뜻한다.

예를 들자면 LG전자가 자사 스마트폰 50개 모델에 마이크로소프트(MS) 모바일 운영체제인 윈도 모바일만 사용키로 한 것이나 덴마크 완구업체 레고와 미국 월트디즈니의 협력, 세계적 오디오 브랜드인 뱅앤울룹슨과 삼성전자가 손잡고 신개념 휴대전화를 만들거나 중저가 의류브랜드 H&M이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한시적으로 손잡고 신제품을 내놓는 따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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