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할 시간에 수영을 해볼까
연휴는 좋아하지만 명절은 싫어한다. 명절이 싫어진 것은 딸에서 며느리로 신분이 달라지면 서다. 결혼을 하자 시가에서는 명절에 시가에 오는 것을 당연시 여겼고, 본가에서는 출가외인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우며 오지 말라고 했다.
시가는 강원도 본가는 경상도이다 보니 서울에서 출발해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것 자체가 자유형 5바퀴를 쉬지 않고 도는 것만큼이나 숨 가쁜 스케줄이기도 했다. 그 핑계로 늘 명절에는 시댁에 다녀오고, 명절 전 후에 본가에 다녀왔다. 동생까지 결혼 한 후로는 점점 부모님과 동생과 내가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들어졌다.
"이번 설에는 한복을 가지고 오너라."
"남자는 상 드는 것 아니다. 네가 들어라."
"손이 그렇게 느리게 해서 어느 세월에 설거지를 다 하겠니?"
"살쪘니? 운동 좀 해라."
"살 빠졌니? 진작에 좀 빼지."
결혼 이후 명절은 매번 새롭게 샘솟는 시모의 잔소리를 들으며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나날들이었다. '며느리란 무엇인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맞이한 첫 명절에야 아빠와 나 동생이 추석 당일에 모여 엄마의 차례를 지냈다. 그날 이후 명절은 엄마 산소와 시가를 오가는 나날이 되었다.
수영이 좋아지고 나서 명절이 싫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명절에는 수영장이 문을 닫는다. 슬퍼할 시간에 수영장에서 자유형 뺑뺑이라도 돌면 좋으련만. 그럼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명절에는 수영장 직원도 강사도 라이프가드도 쉬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하니 수영장 문을 닫는 게 당연한 일이다. 대신, 명절 전 후 수영 강습의 강도가 세진다. 수영 강사들은 명절 전에는 체력을 끌어올리고, 후엔 무거워진 몸을 가볍게 만들어줄 기세로 몰아치는 수업을 하곤 한다.
“아줌마들 기운 빠져서 전 어떻게 붙이라고 이렇게 빡세게 시켜?"
이번 설 연휴 전 수영장 탈의실에서 한 상급반 회원의 푸념을 듣고 따라 웃었다. 이번 주 중급반에서 오리발 데이에는 자유형으로 꼬리 잡기를 한 덕에 하루에 1300m씩 수영을 하기도 했다. 상급반은 인터벌 수영으로 2300m를 했다고.
'설 연휴에 문 여는 수영장은 없나?'
4일 연속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막상 연휴 전날이 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직 나 때문에 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수영을 했더니 체력이 는 것도 같다. 때마침 수영복 브랜드 배럴에선 인스타그램에서 설 연휴 정상 운영 수영장 안내 포스팅을 올렸다. 그중 한 곳은 얼마 전 만난 후배가 가보라고 추천해 준 삼성 레포츠 센터였다.
교대역과 강남역 사이에 있는 삼성 레포츠 센터는 삼성에서 운영하는 호텔급 수영장으로 일일자유수영 입장료 19,000원을 내면 하루 종일 이용할 수 있다. 샤워실에는 작지만 온탕과 사우나가 있고 샤워타월, 수건, 샴푸, 바디워시도 비치되어 있다. 단, 주차비는 2시간만 무료다.
그렇다면, 설 연휴를 자유수영으로 시작해 볼까? 남편 옆구리를 쿡쿡 찔러 기어이 수영장에 다녀왔다. 25m 자유수영 레인만 8개(초중상으로 나누지 않고 빠른 자유수영, 느린 자유수영)이라 느린 자유수영 레인에서 이번주에 배운 자유형 원비트킥을 연습하기 좋았다. 25m 풀과 20m 풀 사이에 매시각 50분마다 쉬는 시간에 들어가 있기 좋은 온탕에 앉아 쉬기도 편했다.
자유수영을 2시간이나 하고 왔더니 저녁을 먹고 난 후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서 든 생각은 '아, 골 때리는 그녀들 골림픽 수영경기 못 봤네'와 '브런치북 연재해야 하는데 어쩌지.'였다. 새벽 3시가 다 되어 가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혹시라도 연재를 기다리셨다면 미안합니다. 다음 주에는 화, 금에 연재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내일은 설날이다. 떡만둣국을 끓여 먹고 엄마 산소에 다녀올 것이다. 엄마 나무 앞에 서면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암투병 하던 엄마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오겠지. 돌이켜 보면 보호자로서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한 미안함은 사라지지 않겠지.
내일은 아픈 기억 말고 즐거웠던 기억을 엄마와 나누고 싶다. 엄마 기억나?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엄마가 수영 캠프 보내준 거. 엄마가 집 근처에서 버스 태워주면 내가 혼자 수영장에 갔다며. 버스에서 내리면 엄마가 안아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 그때부터 엄마 냄새가 참 좋구나 느꼈던 것 같아. 그해 여름 야외 수영장에서 배운 건 물에 뜨는 것 정도였던 것 같지만 그때 엄마가 수영장 보내준 덕에 나는 지금도 물에 뗏목처럼 둥둥 잘 떠. 물도 무서워하지 않고 부력이 좋은 어른이 되어버렸지 모야. 요즘처럼 수영을 즐기며 사는 게 다 엄마 덕이야. 고마워.
유난히 엄마가 그리운 날들이 있다. 명절과 생일. 올해는 하필 설날 다음 날이 내 생일이다. 생일에도 설 연휴 문 여는 수영장에 다녀올까 생각 중이다. 물속에서 안 되는 자유형 원비트킥을 하려고 애쓰는 동안은 슬픔도 흘려보낼 테니. 그렇게 자유수영을 하다 보면 자유형 원비트킥을 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