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나가는 비결은 당장 시작하는 것
새해에는 누구나 결심을 한다. ‘운동, 다이어트, 금연, 금주’는 아마도 누구나 하는 새해 4대 결심이 아닐까. 2022년 1월, 나도 누구나 중 한 명 답게 새해 결심을 했다. “올해는 글만 쓰지 말고, 몸을 쓸 거야!”라고 남편에게 호기롭게 말해버렸다. 돌이켜 보면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결심이지만 그때는 운동을 하겠어 보다는 식상하지 않고, 글만 쓰지 않고 몸을 쓰겠다 표현의 운율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술김에 한 결심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드니까 한 잔? 호방하게 잔을 부딪히려는데 불쑥 남편이 물었다. “하고 싶은 운동이 있어?”
아뿔싸. 예상질문 따위 생각지도 않고 내뱉은 새해 다짐이었는데. 몸 쓰기에는 걷기나 계단 오르기가 포함되는 아닌가. 꼭 특정 종목의 운동이어야 하나. 먹고 싶은 음식은 많아도 하고 싶은 운동 없는 운동무능력자로 살아온 지 언 40여 년. 하기 싫은 운동도 아니고 하고 싶은 운동이라니. 무슨 종목이든 대답하려고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다 문득 ㅋㄹㅇㅁ이 떠올랐다.
남편 “(눈을 크게 뜨고) 클라이밍?”
나 “응, 클라이밍. 내가 책 빌리러 다니는 구립도서관 맞은편에 클라이밍장이 있더라.”
남편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클라이밍?”
나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
마침 신이 날 만큼 와인을 마셨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 술술 나왔다. 신이 과하게 나서 네이버 지도에서 오다가다 본 H 클라이밍을 검색했다. 그곳에는 일일 이용과 일일체험에 암벽화까지 대여해 주는 일일체험권이 있었다.
“일일체험이 있네, 같이 해볼까?”
“네가 해보고 싶으면, 같이 가줄게.”
“그래, 지금 예약한다!”
나는 취객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추진력으로 클라이밍 일일체험 2인 6만 원을 결제해 버렸다. 결제한 후에야 의심이 들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심을 하고 보니 내가 결제한 일일체험권은 환불 불가 요금이었다. 문득, 곰이 떠올랐다. 그래, 곰도 나무에 오르는데 곰을 닮은 나라고 벽을 못 탈까. 탈 수 있지. 탈 수 있고 말고.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후회했다. 뭘 예약한 거야. 한숨이 나왔다. 한숨을 쉰다고 환불불가 요금이 환불가능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결제한 김에 클라이밍이란 무엇인가 체험이나 해보자 싶었다. 말하자면 새해맞이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는 시도랄까. 음, 시도란 좋은 것이니까.라고 생각하니 흐뭇하기까지 했다. 클라이밍장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H클라이밍장에 들어선 순간 직감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구나.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삼각대 위에 올린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촬영하며 벽을 타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다. 영상을 촬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유튜버의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안내 데스크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거부할 수 없는 환불불가의 위력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일일강습이 시작되자 클라이밍 선생님이 강습생들에게 물었다.
“친구가 클라이밍이 재미있다고 해서 같이 하려고 왔어요!”
“클라이밍이 해보고 싶어서 왔어요!”
클라이밍이 처음이라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대답을 했는데, 나만 요 앞 도서관을 오가다 뭐 하는 덴가 궁금해서 왔다고 대답했다. 다들 여기 클라이밍장이 있다는 건 알아도 건너편에 도서관이 있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클라이밍장의 벽은 지구력과 볼더링으로 나뉘는데 일일체험은 지구력에서 시작해 볼더링으로 옮겨가며 클라이밍이란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알아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작은 꽤나 공평해 보였다. 모두가 지구력 벽에 개구리처럼 붙어서 배웠다. 막상 지구력 벽에 매달려 보니 내 몸이 내 마음 같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데, 발이나 팔을 뻗어서 몸을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며 오르락내리락하며 최종 지점까지 가기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아, 벽에서 툭 떨어져 죽은 척할 수도 없고.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일일체험에서 함께 체험해 보는 난이도 1,2 수준의 볼더링은 지구력에 비해 쉬웠다. 어찌어찌 ‘완등’이란 걸 약간의 쾌감도 느껴졌다. 지구력벽에 매달려 버티다 털썩 떨어질 때만 해도 어서 집에 가고 싶었는데, 완등을 하고 나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강습을 제대로 받아볼까?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남편과 나는 클라이밍 강습과 한 달 이용권을 결제했다.
강습 첫날, 클라이밍 이 너무 좋아서 클라이밍 강사가 되었다는 선생님은 수강생을 한 자리에 동그랗게 모아 놓고 이론 설명을 한 후, 레벨에 따라 다른 지구력이나 볼더링 벽으로 이동해 직접 해보도록 했다. 저마다 벽에 매달려보니 수강생의 레벨은 초급부터 상급까지 제각각이라는 게 드러났다. 클라이밍 선생님은 한 명 한 명 눈높이에 맞춰 피드백을 주었다.
그날 이후 클라이밍 강습에 갈 때마다 나는 의도하지 않은 몸개그를 하다 벽에서 허무하게 떨어지곤 했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디가 어려웠어요?”
“클라이밍에 좋은 운동은 뭐가 있어요?”
하루는 남편이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실내자전거와 수영이라고 대답했다. 클라이밍을 잘하고 싶어 10kg를 감량했다는 선생님은 지금도 넷플릭스를 볼 때면 자전거를 탄다고 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초등학교 때 배우던 수영이라면 클라이밍보다는 쉽게 할 있을 것 같았다. 그날 화이트 실내자전거를 주문하고 수영 강습을 알아보았다. 다음 달부터 저녁 9시 수영 초급반에 강습을 받기 시작해 초등학생 시절 포기했던 평영과 접영을 배웠다.
그 후로 1년 반이 넘게 넷플릭스를 볼 때는 실내자전거를 탔으며, 수영강습을 받은 지 3년 차에 접어들었다. 2023년 5월부터 지금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에 집을 나서는 새벽수영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작하고 보자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클라이밍 수업을 등록하고, 실내자전거를 주문하고, 수영 강습을 등록했기에 운동 좋아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이번 설날 연휴에는 명절이라 수영장이 문을 닫은 게 아쉬워 설날 문 여는 수영장을 검색해 자유수영을 다녀왔다. 15분 20분이라도 요가 매트를 깔고 홈 요가를 하기도 했다. 내일은 오리발 데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수영 가방을 쌌다.
클라이밍 강습은 2달 받고 난 후 중단했다. 포기한 게 아니라 다시 클라이밍을 할 때까지 쉬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수영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클라이밍 장에서 볼더링 보라색(볼더링의 난이도는 빨주노초파남보 무기개색 순으로 높아진다.)을 멋지게 완등해 내리라는 희망도 품고 있다.
"올해는 매일 수영하고 글 쓰고 요가하는 사람이 되겠어."
설 연휴 마지막 밤, 새해맞이 새로운 결심을 하나 해본다. 매일 습관처럼 몸을 쓰고 마음을 쓰다 보면 필요 없는 힘을 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나가는 비결은 시작하는 것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되새기며 일단 내일 새벽수영부터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