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인의 필수품은 수영복, 수모, 수경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마음!
새벽수영인의 밤 루틴은 수영가방 싸기다. 매일 밤 마치 직장인이 회사에 입고 갈 옷을 고르듯 내일은 무슨 수영복을 입을지, 그 수영복에는 무슨 수영 모자를 쓸지 고른다. 물론 수영복이 단 하나 수모도 단 하나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미 수영복 부자가 되어버린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즐거운 고민이다.
이를테면 타이백(등 라인을 묶을 수 있는 백 디자인) 땡땡이 수영복에는 땡땡이 스판 수모, 유백(어깨 눌림이 적고 쑥 입기 좋은 백 디자인) 초록색 수영복에는 초록 그림이 그려진 흰 실리콘 수모 이런 식으로 수영복과 수모를 고른다. 깔맞춤이 인생의 낙이자 특기이자 강박인 나에게 서로 어울리는 수영복과 수모를 고르는 일은 사뭇 진지한 일이다. 초급반 시절 어쩔 수 없이 사게 된 핫핑크색 롱핀에 맞춰 수영복을 산적도 있다.
다행히 수경이 단 2개라 둘 중 어떤 수경을 가져갈 지만 챙기면 된다. 둘 중 하나는 스키장 가냐, 쿵따리 샤바라 부를 거냐 놀림받을 만큼 렌즈가 큰 블랙 수경이라 주로 무난한 화이트 수경을 챙겨 가는 편이다. 초급반 시절, "회원님은 앞을 안 보고 수영하시냐"는 선생님의 핀잔에 괜한 수경 탓을 하며 거대한 고글형 나이키 미러 블랙 수경을 장만했는데 렌즈가 너무 어두워서 쓰면 더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다는 슬픈 사연이 깃든 수경이다. 게다가 자유형을 할 때 앞이 잘 안 보였던 것은 수경의 사이즈가 아니라 내가 먼 바닥을 보지 않고 바로 아래 바닥을 보고 수영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자유형 할 때 너무 자유로워지는 내 고개 각도를 고치기 위해 노오력 중이다.
어떤 수경을 쓸지 정하든 꼭 챙기는 물건이 용품이 하나 더 있다. 안티포그액이다. 김서림 방지 기능을 소실한 수경을 심폐소생시켜 주는 놀라운 용품으로 스펀지 스틱 스프레이 형이 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기 위해서 라며 봉지에 끓이는 법을 읽고 따라야 하듯, 수영 김 서림 방지를 위해서는 사용 방법을 숙지하고 써야 한다. 안티포그액 바른 사용법은 이렇다. 수경 렌즈 안쪽에 안티포그액을 골고루 바른 후 10~15분 충분히 건조한 후 사용 직전 차가운 물에 살짝 행군 후 착용하면 된다. 참 쉽죠?
수영복 싸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실내 수영장 강습 시간에 5부 바지 수영복이나 거의 팬티 같은 사각 또는 삼각 수영복을 입는 남자들과 달리 나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는 여성 수영인이기에 브라캡 또는 니플패드를 챙긴다. 수영을 할 때만이라도 브라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몸에 착 붙은 수영복 특성상 하지 않을 경우 유두 자국이 선명하게 나기에 챙겨간다. 니플패치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상의를 탈의 한 채 수영장에 들어오는 남자 수영인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여기까지가 (여성) 수영인이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려면 꼭 필요한 수영복, 수모, 수경, 안티포그액, 브라캡 5가지 아이템이다. 여자든 남자든 귀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귀마개를 챙기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가글, 샴푸, 샴푸 브러시, 컨디셔너, 바디워시, 샤워타월, 샤워 후 쓸 타월, 바디로션, 화장품 일절까지 챙겨 가려면 수영가방은 보부상처럼 커질 수밖에 없다. 참 머릿결이 개털급으로 안 좋은 나는 젖은 머리용 웻브러시와 헤어오일도 바리바리 챙겨 다닌다.
하마터면 제일 중요한 오리발 이야기를 건너뛸 뻔했다. 다음날이 오리발 데이라면 롱핀이든 숏핀이든 핀도 미리 챙겨둬야 한다. 설 연휴 전 탈의실에서 만난 수친(수영 친구)이 털썩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D언니에게 빌려줄 숏핀만 가져오고 롱핀을 안 가지고 왔어."
깜빡하고 오리발을 가져가지 않으면 맨 뒤에 서서 맨발로 수영을 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설 연휴 전 인터벌 운동을 하던 때라 나는 가엾은 수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단 가지고 들어가. 살고 봐야지."
사실, 오리발 보다 안 가져갔을 때 심각한 아이템은 수경이다. 수영장에서 50분 간 눈을 감고 수영하거나, 물속에서 눈을 뜨고 수영할 자신이 있다며 모를까. 수경 없이 수영 강습을 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 불가능한 일을 내가 겪을 뻔했다.
설 연휴 다음날 지각을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경보하듯 걸어 수영장에 도착했다. 이 스피드 그대로 빠르게 샤워를 하려는데 내 수영가방 어디에도 수경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수영가방에서 일명 쿵 따라 샤바라 수경을 꺼내고 화이트 수경을 넣는다는 게 넣지 않은 것이다. 집에 다시 돌아가 수경을 가지고 오면 20분을 걸릴 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자 샤워실 관리를 담당하는 여사님에게 여쭤봤다.
"혹시, 남는 수경 하나 있을까요?"
"그럼, 있지."
지니를 영접한 알라딘이 된 심정으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 들었는데.... 초등학교 때나 썼을 법한 퍼런 수경이었다. 핫핑크색 롱핀(오리발)에 맞춰 핑크 그러데이션이 돋보이는 블랙 수영복과 블랙 수모를 챙겨 왔건만.
그날 이후, 새로운 습관 하나를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수영장에 다녀온 직 후 수영 가방을 싸기 시작!
오늘 수영이 끝나자마자 내일의 수영이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수영가방을 잘 싼 후에는 오늘은 잘 안 됐지만 내일은 잘 될 거야.라는 마음도 솔솔 뿌려 놓는다. 오늘 오픈턴(사이드턴)이 안 됐다고 해서 내일도 안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1mm라도 성장하는 수영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