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텃세란 무엇인가?
"이제 상급반 온 애가 이렇게 화려한 나이키 수영복을 입어? 싼 수영복 사 입어."
수친에게 들은 이야기다. 하하하. 웃음이 났다. 여기 내 자리야 나와하며 샤워실 자리 맡기, 수영장 스타트 라인 점령하고 안 비켜 주기 같은 텃세는 듣고 겪어봤지만 수영복을 입어라 마라 하는 텃세라니. 너무 신박한 텃세 아닌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텃세를 검색해 보았다. 텃세의 사전적 정의는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 의식. 또는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이다. 먼저 상급반에 온 회원이 뒤에 상급반에 들어오는 회원에게 특정 브랜드 수영복을 입어라 말아라 말하는 것은 특권 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란 얘기인가.
문득 저녁 9시 수영강습을 듣기 시작한 지 서너 달쯤 된 초급반 시절, 초급반의 고인물이자 늘 내게 친절했던 회원분이 떠올랐다. 내가 평영 발차기가 너무 안된다고 내가 답답해할 때면, 웃으며 수업 끝나고 연습해 봐라 하다 보면 는다고 응원해 주던 분이었다. 그 응원덕에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도 평영 연습을 했다. 하루는 가는 둥 마는 둥 아주 느린 평영으로 수영장 끝에 겨우 갔더니 수영 선생님이 나를 반기며 말을 걸었다. "회원님, 저 슈트가 잘 안 벗겨져서 그런데 지퍼 좀 내려줄래요?" 그럴 수도 있구나 웃으며 지퍼를 내리는데 친절한 회원님이 나타나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물었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순간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어 눈만 껌뻑거렸다. 참고로 그 수영 선생님은 얼마 후 바디빌딩 대회에 출전한다고 수영장을 그만 둘 정도로 막대한 근육의 소유자였다.
그날 이후 그 회원님이 더 이상 내게 친절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기분 탓일까. 그 또한 텃세였을까. 텃세까지는 아니겠지. 상급반에 오려면 떡을 돌려라 정도 돼야 텃세지. 불현듯, 2년 전 수영장에서 받은 문자가 떠오른다.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급반에 오려면 떡을 돌리라고 했다는 제보를 받았으니 이 같은 텃세를 겪었다면 주저 말고 이야기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같은 초급반이었단 남편과 나는 그날 '상급반에 오려면 떡을 돌리라'는 이야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상급반에 갈지 말지 정해주는 건 수영 선생님인데 다른 회원들이 떡을 돌리라는 게 말이 돼?"
"그러게, 떡이 그렇게 먹고 싶은가? 술도 담배도 아니고 떡이면 여자 회원이 그런 거겠지?"
"아, 그러네..."
그날 이후 나는 떡 돌리는 풍습을 괜히 미워했던 것 같다. 맛있는 떡은 죄가 없는데 말이다. 떡을 돌리라고 강요하는 텃세가 이상한 것이지. 다행히 아직 상급반에 가기에 갈 길이 너무 먼 나는 그런 텃세를 경험한 적은 없다.
수영장에서 과연 이런 텃세가 많을까? 궁금해서 이 수영장 저 수영장 다녀본 S언니에게 물어봤다.
"언니, 다른 수영장 다닐 때 떡 돌리라는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그럼 있지. 그땐 새로운 사람이 오면 떡을 돌리라고 했어."
"진짜? 떡이 그렇게 먹고 싶데요?"
"간식 쏘라는 거지. 간식을 쏴야 편해져. 말도 마 그때는 총무들이 뻑 하면 돈을 걷었어."
"왜요?"
"명절, 스승의 날 그럴 때 수영강사님 챙겨준다고."
"언제까지 그런 거예요?"
"아마, 김영란 법 전까지?"
S언니와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중급반에 말수가 없던 회원님도 대화게 끼어 자기도 그런 일을 당했다고 증언해 주셨다. 단 두 명의 경험담으로 수영장 텃세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수영장에서 떡을 돌리라고 강요하고 돈을 걷던 김영란법 이전으로 성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별한 날 수영 강사님에게 고마움의 표시를 돈을 걷는 게 적절한 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 같다. 회원들의 처신의 문제라기 보다 수영 강사 처우의 문제라 생각한다. 그 시절 수영강습을 듣지 않은 나로서는 누가 봐도 수영 강사의 처우가 합당했다면 회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고마움을 표시하자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김영란 법 이후 수영장 텃세는 사라진 것일까? 내 대답은 '아니요'다. 아니요라고 말하는 게 맞을까. 다시 한번 텃세의 의미를 살펴보자. '텃세란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 의식. 또는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말한다. 텃세의 사전적 정의를 처음 읽었을 때는 '특권', '업신'같은 단어에 깊은 빡침이 느껴졌는데 두 번 세 번 읽다 보니 '자리'라는 단어에 눈이 갔다. 아마도 내가 요즘 수영장에서 느끼는 텃세가 '자리'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속한 중급반은 중급반 1번, 중급반 2번 2개 레인을 쓴다. 중급반 1번에선 초급반에서 갓 넘어온 중급반에 온 지 짧게는 몇 개월이상 된 회원들과 몇 년이 지나도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 회원들이 강습을 받는다. 중급반 2번 레인은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온 지 얼마가 지났느냐의 문제보다 누가 봐도 1번 레인보다 속도가 빠르고 영법을 잘 소화하는 회원들이 강습을 받는다. 초급반에서 중급으로 오면 누구나 1번 레인에서 수영 강습을 받지만, 2번 레인으로 진출하는 것은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온 순서와 상관없다는 얘기다.
나는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온 지 7개월 차지만 아직 2번 레인으로 가지 못했다. 이번 달부터 레인별 인원 비율이 안 맞을 때 강사님이 나와 몇몇 회원들을 2번 레인으로 보내긴 하지만 아직 그 속도에 맞춰 자유형 뺑뺑이를 돌기는 벅차다고 느낀다. 수영은 뱀 머리보다 용 꼬리를 해야 실력이 는다지만, 꼬리에 선 내가 못 따라가서 1번의 앞길을 막을까 봐 걱정도 된다.
자유수영을 할 때도 그렇지만 수영강습을 받을 때는 모두가 안전하고 원활하게 운동량을 보장받으며 수영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자리(순서)에서 앞뒤 사람을 방해하지도 앞뒤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수영에 집중하고 싶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날그날 수영강습을 받으러 회원도 다르고 내 컨디션도 달라지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설이오나 오리발을 신고 수영하는 회원들도 방해에 한몫을 단단히 한다. 수영장에서 지정한 오리발데이는 월, 화요일인데 나이가 들어 체력이 달린다는 이유로 매일 오리발을 착용하고 수영하는 연장자들이다. 평소에는 오리발 덕에 더 체력이 좋고 속도가 빠른 회원들보다 빠를 수 있지만 오리발 데이에는 롱핀을 차도 그분들이 느린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내가 두려워하는 맨 뒤에 선 연장자들이 1번의 앞길을 막고, 1번 뒤 2번, 3번, 4번 모두가 정체되며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수영 선생님이 그분들께 속도가 느리니 오리발데이에는 1번 레인에서 수영을 하라고 했더니, 나이가 들었다고 무시하냐며 불같이 화를 내며 이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누구보다 온화한 얼굴로 수영을 하는 어르신들이지만, 먼저 그 자리에서 수영을 했다고 오리발 데이만 오리발을 쓴다는 규칙도 어기고, 레인을 이동하라는 수영 선생님의 말도 무시하고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모습이야 말로 특권 의식 아닌가.
나는 요즘 중급반 1번 레인과 2번 레인을 오가며 내 체력과 실력을 가늠하는 중이다. 지난해 여름 나와 함께 중급반 1번 레인으로 왔던 친구들이 더 이상 수영강습에 나오지 않고(얘들아,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힘들어 데쓰.) 나보다 뒤에 중급반에 왔지만 실력과 체력이 나은 회원들이 2번 레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내겐 이상한 책임감 같은 게 샘솟았었다. 아, 이제 내가 1번이구나. 내가 빨리 수영해서 앞으로 치고 나가야지. 오리발 데이엔 롱핀을 신고 1번을 자청해 미친 듯이 수영을 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롱핀을 신어도 자유형을 10바퀴 이상 하라고 하면 혼자 횡형을 하지 않나, 나는 앞으로 치고 나갈 체력이 없다는 것을.
문득, 내가 먼저 중급반에 왔다고 나보다 뒤에 왔지만 체력이 좋고 실력도 빨리 늘 20대 회원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먼저 가도 돼요.", 먼저 출발할래요?", "앞에 설레요?"
부디. 나보다 오래 수영을 한 회원님들도 실력이 나이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냐는 말을 하기 전에, 나이가 들었다고 나이 어린 수영 선생님을 무시하신 건 아닌지 묻고 싶다. 무엇보다 나이 들었다고 오리발 데이가 아닌데 오리발을 착용하는 건 수영장에서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는 행동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자리 텃세로 인해 수영장을 떠나는 철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셨는지? 그런 의미에서 요즘 생각이 많았다. 한동안 적어도 나로 인해 수영장 다니기 싫다는 사람은 없어야지 마음으로 수영장을 오갔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는데, 지갑을 열어도 돈이 없으니 말이라도 줄이자 다짐하며. (수영장에서 말실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